빌뱅이 언덕, 권정생
처절하게 가난하고 견디지 못할 만큼 아팠던 그의 삶은 그를 자연, 사람과 종교, 세상에 대한 처절한 고민으로 이끌었다. 책 속에 담긴 살아온 이야기는 개인사이지만 우리 모두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한국의 현대사를 압축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한국전쟁을 겪어내고, 군사정권을 받아낸, 우리 민족의 이야기가 있다. 아픔과 절망과 좌절이 끊이지 않았던 그 지독했던 시간은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마찬가지로 가혹했으리라. 그러나 삶은 늘 모순이듯 지독하고 절망적인 시간에서 조차 산과 들에는 꽃이 피고 꽃을 보는 사람의 마음에도 사랑이 핀다. 그렇게 전부인 것 같으나 전부가 아닌, 모순 투성이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대우를 받지 못한 이들. 식민지 백성, 가난한 사람, 질병이 있는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의 이야기들이 있다. 비록 삶은 팍팍했고 현실은 고약했지만 그 속에서도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들 말이다. 그는 예의와 인간성을 상실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인간답게 되기 위해선 먼저 환경과 여건이 알맞게 갖춰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할 때 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 자녀를, 우리 후손을 잘 기르기 위해선 어떤 마음 가짐으로 양육을 해야 하는지, 단지 양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녀를 기르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쳐야 우리 자녀를, 더 나아가 우리 사회를, 이 세상을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더 행복하고 아이를 더 잘 기르고 싶어 사교육과 사는 집과 내가 타는 차라는 현실에 매몰된 우리가 읽어야 할 들어야 할 더 중요한 이야기들이 여기 있다.
겁도 없이 삶의 의미를 찾으며 부르짖었다. 내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지금보다 더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주위를 서성였다. 하지만 정직하게 날 세워두고 물어본다.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대로 살아갈 용기가 있는지 말이다. 실은 그 용기가 없어 이렇게 삶의 본질 앞에 다가가지 못한 채 주저 댔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읽은 권정생 선생님의 삶이란, 내가 바로 의미 있다 여기고 옳다 생각하는 그러한 삶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의미 있는 삶이 내게 가난과 질병과 고통을 준다면, 그 의미를 몰랐던 때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아마도.
책의 마지막, 부록 앞의 그 글. 창섭이 이야기를 읽고선 내 안의 무언가 모를 설움과 원망이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세상에서 한없는 약자였던 창섭이가 단지 하늘로 간 게 슬퍼서는 아니었다. 외로웠을 그였고 유일한 친구였던 권정생 선생님조차 그 마지막을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다. 그저 창섭이 불쌍해서 울음이 터져 나온 거라 생각했는데 약자였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의 엄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 마음도 몸도 자라고 튼튼해질수록 엄마는 더더욱 약해졌다. 내가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가정을 꾸리고 안정적인 삶을 갖춰갈 때 더 불안정함 속에 빠져버렸다. 내가 강해질수록 엄마는 약해졌으며 엄마는 내 앞에서 한없는 약자였다. 오랜 우울과 조울증으로 술 없이는 살 수 없었고 그런 엄마는 내 인생의 오점이고 치욕이었다. 내가 이렇게 잘해왔는데, 내가 이렇게 잘 컸는데, 이렇게 엄말 위해 살고 있는데 엄마는 왜 변하지 않을까, 왜 그 모양일까, 기도하며 따졌다. 매일 밤 남편이 자고 아이가 자는 밤 거실로 나와 숨죽여 울었다. 엄마로 인한 불안과 창피와 치욕스러움으로 가득 찬 나의 사춘기.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에 지쳐 난 내가 약자라고 생각했다. 아픈 엄마의 마음은 헤아릴 여유조차 없었다.
창섭이처럼 우리 엄마도 그렇게 갔다. 어느 날, 인사도 없이, 기색도 없이, 외롭게 혼자 갔다. 갈 줄 알았다면 내가 손 안 잡아준 지 몇 년이나 되었으니까 손이라도 잡아줬지. 안아라도 줬지. 죄책감 많이 안 생기게 위로라도 한번 해줬을 텐데 이 세상에서 따뜻한 위로 한번 받지 못하고, 언제나 죄인으로 살다가 그렇게 갔다. 그해 가을이라는 글의 창섭이 이야기에 권정생 선생님의 마음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없지만 나는 안다. 저 단락과 단락, 문장과 문장 사이에 뼈저린 후회와 아픔과 자책이 있을 것임을. 배가 아프다는 열여섯 창섭이. 엄마가 나한테 하고 싶지만 하지 못했던 말 같아서 마음이 막 쓰리고 아프고 한다. 권 선생님은 창섭이 배 단추라도 여며주었지, 난 그것조차 못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밑줄 그은 문장만 수십 개가 넘고 들었던 생각이 수 백가진 되는데... 마지막 창섭이 이야기에 아직도 내 맘 속에 있던 엄마로 인한 회한과 자책과 설움이 나왔다.
권정생 선생님처럼 의미 있게 살고는 싶으나 초라하긴 싫다. 가난하고 청빈한 삶이 대단해 보이나 가난하긴 싫고, 내 아이가 사는 세상이 올바르게 되었으면 싶으나 내 아이가 뒤쳐지는 것은 싫었다. 읽는 내내 선생님의 말엔 참 동의가 되고,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을 치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는 그렇게 살기 싫은 걸까. 그만큼 나의 삶 속 풍요와 편리함은 나의 일부가 되었고 당연함이 되었다. 내가 얻는 풍요와 편리함 가운데 어디선가 오염되고 불편해지는 그 어떤 무언가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당연하다는 생각이 자리 잡은 것 같다. 권정생 선생님은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선택했다. 자신이 옳다 여기는 대로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대중 앞에서 강의하고 그들을 가르치지 않았다. 단지 그대로 살아내셨다. 이 얼마나 대단한가. 나였다면 살아내기 이전에 말부터 하고 글부터 썼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글이 더 힘이 있고 문장 자체로 날 흔드는지도 모르겠다. 살아낸 삶에 대해 직접 살아낸 생각에 대해 쓰셨으니까. 선생님이 천국을 보는 그 시선과 시각의 거듭남은 선물 받으신 걸까, 얻어내신 걸까, 둘 다일까. 나는 그 거듭남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 지 쓰라리게 돌아본다.
이 책을 읽고 떠올랐던 장혜영 씨의 노래를 붙인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장혜영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아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
모두가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
흐르는 시간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네
라라리 라라리 라라리 라리라라
라리라라 라리라라 라라라라라리라라
라라라라
언젠가 정말 할머니가 된다면
역시 할머니가 됐을 네 손을 잡고서
우리가 좋아한 그 가게에 앉아
오늘 처음 이 별에 온 외계인들처럼
웃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