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리고 싶냐는 말.

누군가의 노년.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늙음, 그리고 노동.

by 한시영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전에 이곳을 떠난다. 끝까지 남는 건 여기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 딸에 대하여, 김혜진


요양원. 여기가 아니면 안 되는 노인 요양 보호사들만이 남겨진 상황.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그런 사회. 늙어가는 몸을 가지고도 끝없는 노동의 굴레에 갇힌 사람들. 새벽 1시, 잠들지 못하고 소설책을 꺼내 접어놓은 부분을 찾아 굳이 이렇게 옮기는 것은 오늘 있었던 일 때문이다.

첫째를 등원시키고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는데 아파트 여자 관리 소장이 우리 동을 청소해주시는 할머니와 말씨름을 하고 있다.

“그니까, 왜 한 번 말하면 못 알아듣냐고요. 여기 1층에서 이거 걸레 빨면 안 된다니까요? 왜 지침을 안 따라요, 지침을”

“아니, 이거 지하로 가려면 지하 2층을 계단으로 오르락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그래서 그래.”

“여기서 걸레 빨면 비눗물 나오고 수도 막히고 안된다고 몇 번을 말해요. 네?”

“지하로 가라는 말이지? 아니,, 이게 참.”

“잘리고 싶어서 그래요? 잘려볼래요? 네?”

잘리고 싶냐는 그 한 마디로 상황은 정리가 되었다. 자신의 상황을 토로하던 청소 노동자 할머니는 “아니야, 내가 잘할게.”라고 말씀하셨다. 그 연세에 그 몸으로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건 어려움이 아니라 불가능에 가까웠겠지. 상황에 개입할 틈도 없이 할머니의 순응으로 상황은 종료가 되었고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왔다. 아이를 내려놓고 손을 씻고 집안일을 하는데도 눈앞에 펼쳐진 갑질. 내 생활공간 주변에서 행해진 갑질은 쉬이 잊히지가 않는다.

하지 말라고 최소 다섯 번 이상 지침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집 세신 할머니가 여태 그것을 지키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 소장도 힘들었으니까 그랬겠지, 하며 넘기려는데 그냥 넘길 수가 없다. 넘겨지지가 않는다. 나이가 많고 몸이 성하지 않고 일자리 시장에서 매력적이지 않은 노인의 위치.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고용주들은 그 자리를 볼모로 그들을 굴복시킨다. 사람들 앞에서 잘리고 싶냐는 말. 그렇게 노인 노동자들을 대하라고 전임에게 배웠겠지. 보고 배우며 그렇게 사람을 다뤄왔겠지.

인터넷에서 내가 사는 아파트를 검색했다. 관리사무소라고 검색된 곳에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전화는 잘리고 싶냐는 말을 한 관리 소장이 아니라 다른 분이 받았다.

“오늘 아파트 000동 앞에서 관리 소장되시는 분이 청소 노동자 할머니께 잘리고 싶냐는 말을 하는 걸 들었어요. 전화받으신 분이 그 이야길 한 게 아니라 제가 전화를 걸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죄송스럽긴 한데, 그 장면을 보니 저는 제가 이 아파트에 사는 게 부끄러워졌어요.

물론 그렇게 말씀하신 분도 이해가 가요. 얼마나 청소하시는 할머니가 지침을 안 따랐으면 그렇게 말씀하셨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제 엄마, 할머니 나이 뻘 되시는 분에게 사람들 다 있는 곳에서 잘리고 싶냐는 말씀을 하신 건 아무래도 심한 것 같아요. 아니, 많이 심해요.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사람 없는 데에서 하시는 게 아니라 정말 조심하셨으면 좋겠어요. 요즘 갑질 논란도 심한데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저희 아파트 깨끗하게 해 주시는 분이니까 저희도 말이라도 좀 더 대우해드릴 순 없을까요?”

전화를 하고 나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누군가의 엄마와 아빠가 생각 나서고, 나의 노년이 생각 나서였을까. 혹시나 이 전화로 우리 동 청소 노동자 할머니께 더 피해가 가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쓰인다.


누군가의 노년.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늙음, 그리고 노동. 시간의 문제인 동시에 이 시대의 문제 앞에서의 이 무력감.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