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탐하는 마음

행복은 찰나인데 늘 행복을 탐한다.

by 한시영

둘째가 자는 사이, 첫째랑 둘이서 종이오리기를 하는데 너무 행복해서 행복해지고 싶던 때가 생각이 났다.


행복하고 싶었다. 불행했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이 주관적이기에 불행했다는 사실이 맞는 건지 불행하다고 생각한 주관적 느낌이 맞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확실한 건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집안에 어른들은 많았으나 나를 지켜줄 어른은 없었다. 의식주를 책임지고 적당한 경제적 풍요로움은 제공해줬으나 어린아이의 생각과 느낌을 돌봐주는, 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어른이 없었다. 거기까진 어른의 역할이 아니라고 못 박아 말하는 것처럼 철저히 모른 척했다, 알면서도. 지금 와서 보니 모두들 반목하고 미워하는 그런 불화 투성이인 집에서 버티느라 그들보다 작고 조그맣던 내가 보이지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행복해지고 싶단 생각이 종종 든다. 그러다 ‘행복이 뭔데?’라는 질문까지 다다른다. 애 둘을 키우면서 나 하나 돌볼 시간이 없어 쩔쩔매는 내가 말하는 행복. 그렇다고 불행하진 않지만 행복하지 못할 조건도 없는.

돌이켜 보니 행복은 늘 찰나였다. 아이를 재우고 남편과 속 깊은 이야길 나누는 그 몇 분. 친한 언니들이랑 주말 아침에 모여 책 읽고 같이 쓰던 그 몇 시간. 잠시 혼자 몸이 되어 버스 안에서 소설책 몇 장을 읽던 시간이 행복했다. 그리고 그건 찰나였다.

행복은 찰나니까, 행복해지고 싶다는 거, 아무래도 욕심 같다. 계속해서 행복을 느끼고 싶다는 건데 찰나의 행복을 계속해서 느낀다고? 나는 욕심쟁이인가.

그래서 행복해지고 싶단 생각이 들면 그 찰나를 보장받기 위해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에게 아일 맡기고 30분이라도 바깥공기를 쐬고 온다든지, 오전에 아일 유모차에 태우고 좋아하는 꼬소한 라떼를 먹으러 다녀온다든지.

행복이 찰나라는 깨달음이 이리도 위로가 될 줄이야. 그 누구도 행복을 영원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글을 쓰면서 행복이나 희망이라는 붕 뜬 단어를 내 사전에서 지워버릴 수 있었던 점이다. “행복이란 거의 없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노년에 자신의 생을 되돌아본 많은 위인들은 자신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합쳐보아야 채 하루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길 위의 철학자>의 저자 에릭 호퍼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지, 불행해지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듯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충족은 또 얼마나 금세 냉소로 식어버리는가. 읽고 쓰고 듣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나는 삶의 ‘행복 불가능성’을, 즉 그냥 살아감 자체를 받아들였다.


에릭 호퍼는 이런 통찰도 내놓는다. “우리는 일이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이 세상에는 모든 이들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건 있을 수 없어요.” 일이 의미 있기를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몰염치’라고 했다는 조지 산타야나의 말까지 덧붙이면서, 삶의 유일한 의미는 배움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 은유, 다가오는 말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