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의 여름, 첫 아이를 임신한 후 얼마 가지 않아 시작된 입덧에 물을 포함한 음식 대부분에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잘 먹지 못해 입고 있는 반팔과 반바지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가 앙상해졌을 때 즈음 엄마가 병원에서 외출을 나왔다. 엄마는 오자마자 손에 든 검은 봉지를 열어 주방에서 급하게 칼질을 하더니 얼음물이 담긴 국그릇 하나를 내놓았다. 오이지를 썰어 담고 물을 채운 후 식초 몇 방울에 얼음을 띄운 ‘오이지 냉국’이다. 어릴 적 여름에 엄마가 해주던 음식. 엄마가 오기 직전까지 먹은 물도 다 게워냈는데 차가운 오이지 물을 들이키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아, 살 것 같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말한 적도 없고, 나도 몰랐던 내가 먹고 싶던 음식을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알고서 준비했을까. 나는 우리 엄마 뱃속에서 나온 게 분명하단 생각을 그 때 했었다. 하루 뒤, 엄마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고 나는 또 잘 먹지 못했다. 엄마가 남겨둔 오이지 오이 두개만 냉장고에 남아있었다.
오이지 냉국을 먹은 이후에도 입덧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가 해준 냉국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싶어. 엄마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뤄질 수 없는 일에 괜한 기대를 가져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아 금방 생각을 접었다.
엄마는 반복된 입원 생활로 인해 병원 바깥에서 일상을 유지하는 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스무살이 된 이후로 시작된 병원 생활은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어졌다. 아빠와 이혼 후 간간히 술을 찾던 엄마가 술에 의지하게 되면서 취한 날이 늘어갔고, 길고 긴 음주는 강제입원만이 끝을 낼 수 있었다. 한 달쯤 입원하고 퇴원 후 시작되는 음주와 반복되는 입원. 엄마가 내 임신 소식을 들은 장소도 병원이었다. 같은 말을 반복한다던 내 또래의 여자아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엄마 말론 치매에 걸려 하루종일 엄마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닌다던 할머니의 혼잣말도 들리는 듯했다. 그 소리들 사이로 조심스레 임신했다는 말을 엄마에게 건넸었다.
입덧 때문에 먹는 족족 토한다고, 힘들어 죽겠다고, 이런 투정을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음에 안도감이 들다가도 안도감은 금새 사라졌다.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점점 쪼그라드는 엄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게 어딘가 미안했다. 딸이 전하는 임신 소식은 할머니가 된다는 설렘도 있었겠지만 자신에게 분리되어 가족을 만들어가고 자리를 잡아가는 딸의 모습에 느꼈을 서운함. 알콜중독이라는 병명으로 병원에 갇혀 지내는 소외감이 전해졌다. 생의 의지를 상실해가고 있는 엄마에게 또다른 생의 시작을 알리는 나의 임신 소식은 엄마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그럴 때면 엄마가 한없이 안타까웠고 엄마를 안타까워해야 하는 내 인생이 더 안돼보였다. 엄마에 대한 연민과 나에 대한 연민은 얽히고 섥혀 때론 죄책감이나 증오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열달을 버텨 첫 아이가 태어났다. 엄마는 첫 손녀를 보고 얼마가지 않아 돌아가셨다.
입덧이 심한 딸의 소식에 병원에서 받은 외출 허가증을 손에 쥔 채 밖으로 나온 엄마를 떠올려본다. 환한 바깥 햇볕에 한손으론 눈 위에 그늘을 만든 채 시장으로 향했을 엄마의 발걸음. 외출 나오기 전부터 딸이 좋아할 음식을 생각하고 종이에 장 볼 목록을 써놨을 거다. 외출 허가증과 함께 살 재료들이 적힌 종이를 손에 꼬옥 쥔 채로 나왔겠지. 병원에서 바로 나와 카드나 현금도 얼마 없었을텐데 그 예산에 맞춰 장을 보기 위해 지워진 목록도 있었을 거고. 그렇게 장을 봐서 내가 말하지도 않았던, 나도 몰랐던 내가 먹고 싶던 음식을 사왔을 발걸음.
나를 낳고 나의 유년 시절을 보내며 함께 밥을 먹던 사람. 본인 스스로도 잘 돌보지 못했던 사람, 어딘가 서툴렀던 사람, 늘 불안해보이고 흔들렸던 사람. 엄마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이전의 물음은 이제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엄마라는 역할을 해낼 수 있었을까로 전환된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산다는 것이 때론 두렵고 불안해서 술로 도피했을 그 마음. 이젠 이해하려 애쓰거나 일부러 밀어내려 애쓰지 않고 전해져 오는 그 마음을 잠시 느껴본다.
엄마가 해준 그 해 여름의 오이지 냉국을 먹고 열달을 버텨 태어난 아이가 이제 여섯살이다. 동생을 둔 어엿한 언니가 되었다. 다음 여름엔 아이와 함께 오이지 냉국을 만들어봐야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