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방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읽고
샐러드 두 개, 소시지 빵 하나를 사서 계산대에 갔다. 앞에 있는 여성이 종이봉투가 있냐고 점원에게 물었고 점원은 비닐봉투만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 빵을 많이 사서 무겁긴 한데, 오늘 에코백을 안 들고 와서…. 그냥 주세요. 비닐은 됐어요.” 하며 비 오는 날 우산과 함께 한 쪽 옆구리과 팔로 5-6개의 빵을 위태위태하게 안고서 나갔다. 바로 뒤에 있던 나는 계산할 차례가 되어 샐러드와 빵을 계산대에 올려놨다. 점원이 물었다. “봉투 드릴까요?” 평소 같았으면 고민없이 봉투를 받아 그 안에 샐러드와 빵을 넣었겠지만, 내 앞에서 비닐을 거절한 그녀를 보니 나도 갑자기 그 멋있는 행동에 동조하고 싶었다. “비닐은 됐어요, 가지고 온 가방에 가지고 갈게요.” 하고 계산을 하고 나오자 선망하며 바라봤던 그녀의 행동과 나의 행동에 ‘자원 절약’ 이라는 공통분모가 생기니 왠지 오늘 하루 전체가 뿌듯할 것만 같았다. 불과 몇 초 사이의 일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의 행동에 동조해서 비닐봉투에 물건을 담지 않은 것. 이 책에서 나온 ‘사회적 증거(Social proof)’라는 원리가 지난 주말 빵집에서의 나의 행동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하버드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인 조슈아 그린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도록 나서게 하는 최상의 방법은 이웃 사람들이 이미 그 행동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이토록 평범한 일상에서 적용되는 심리학이라니. 책에 나온 사례와 소재들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와 맞닿아 있어서 책을 읽은 후 경험하는 일상이 좀더 특별해졌다. ‘지금 저 사람이 한 말, 귀인 오류 아냐?’ ‘지금 내가 한 생각, 인지부조화를 줄이려는 합리화 아냐?’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내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속에 적용되는 심리학 원리들, 책에서 말한 것들이 무엇이 있을지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선택을 통해 나와, 내 가족과 이웃, 더 나아가 내가 속한 집단과 사회 전체가 행복해질 수 있을지에 대해 말한다. 그렇다면 그 선택은 어떻게 이뤄지는 지, 그 선택에 있어서 필요한 것에 대해 말하는데,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착각과 혼란을 지닌 종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 제 1부의 핵심 내용이다. 그것을 염두해야만 살면서 부딪히는 결정의 순간 가운데 수많은 선택지들 중에서 더 나은 답안을 선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런 선택을 하는 주체인 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기는 방법들을 알려준다. 그 전에 먼저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2부를 시작한다. 매스컴에서 말하는 행복, 직장 동료들과의 대화를 통해 행복의 요소라고 믿어지는 것들. 이번에 뽑은 테슬라 신형, 꽤 오른 아파트 값, 2배 오른 주식이 진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지 묻는다.
그러면서 ‘만족스러운 사회 관계 속에서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지수가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를 언급하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행복, 물질적 보상이나 명예로운 호칭을 부여받는 것은 변변찮은 대체물이라고 말한다. 인간 심리에 기반하여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행복해지는 지침’들을 읽으니 행복은 거대한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이 한결 더 와 닿았다. 물질이 아닌 경험을 구매하는 것, 현대 사회에서 우릴 지배하는 쾌락의 쳇바퀴를 탈피하는 것. 우울한 기분이 들 때 움직이는 것과 같은 지침들 말이다. 우리의 행복이 실은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작은 행동의 변화에 있었다니, 어딘가 모르게 그동안 헛발을 짚고 살아온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내게 있어 인생은 의미있는 것이어야 했다. 사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왜 사는가에 대한 대답도 그 누가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 야속한 운명 속에서 그래도 나는 의미있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또는 행복해보이게 만들어줄 것 같은 일이 있다면 거침없이 돌진했다. 지금 하고 있는 심학원 과정이 그랬고, 글쓰기가 그랬고, 작년에 결정한 공동체 주택이 그랬다. 하지만 ‘의미있음’ 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나는 내게 있어서의 행복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고서 그런 선택들을 해왔던 것일까?
며칠 전이다. 아이들과 함께 퇴근을 했다.(아이들이 직장어린이집에 다녀 출퇴근을 같이 한다.) 첫째는 태권도와 피아노에 갔고 두 시간 후에 돌아온다. 집에 오니 4시 반 정도 됐을까. 갓 지은 밥을 먹이고 싶어서 잡곡과 백미를 씻어 불려놓고, 시래기 된장국을 끓였다. 냉동실에 얼려놓은 시래기를 꺼내 살짝 녹은 상태가 되어 칼질이 쉬워지면 잘게 다진다. 그리고 양파와 함께 된장과 국간장, 들기름과 버무린다. 그 사이에 쌀뜨물을 받아 멸치다시마 육수를 냈다. 앞치마를 입을 겨를도 없이 저녁을 만들다보니 이미 입고 있던 티셔츠는 싱크대 물기 때문에 흥건하게 젖어 동그란 문양이 생겼다. 내 발 밑 밑에선 둘쨰가 내 다리를 당기며 “엄마 이루와~”라며 엄마를 찾기도 했지만 마무리하지 못한 주방일 때문에 작디 작은 손에 고구마를 쥐어줬다. 혹여라도 목이 막힐까봐 우유도 한 컵 따라 먹여줬다.
7시가 되자 첫째를 데리러 아파트 현관으로 나갔다. 언니를 데리러 가는 걸 아는 지 벌써부터 둘째 걸음이 통통 튄다. 여름이 시작되어 저녁에도 밝은 하늘은 쾌청하기만 했다. 맑은 하늘을 고개 들어 바라보는 일, 집중해서 여름 냄새를 맡는 일. 언니가 피아노학원 차에서 내리면 언닐 안아주며 반가워 발을 동동 구르는 작은 둘째를 바라보는 일. 내일도 변함없이 이런 하루가 반복된다는 사실에도 권태로움보다는 충만함이 찾아왔다. 그간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고요함과 평안, 만족감이 내 마음이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촉촉한 흙을 손으로 톡톡 눌러주며 평평하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진리를 깨달아가는 일, 알지 못했던 세계에 한걸음 내딛는 일. 남이 볼 때 그럴듯해 보이는 삶의 양식을 갖는 일. 그런 종류의 일이 의미가 있다고 여겼는데. 내 행복의 얼굴은 그것뿐만이 아니었구나 싶다. 반복되는 일상, 지치는 육아와 가사일. 그 순간 순간들 속에서도 마음의 고요함이 찾아왔다. 물론 둘째가 3살이 되고 두 아이 육아가 조금 더 쉬워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지치고 소진되는 날들 역시 많았지만 요즘은 이렇게 손가락으로 톡톡톡 치듯 작고 조용히 찾아오는 평안함을 누리고 있다.
그치만 이건 어디까지나 책에서 나온 에우다이모니아(p.245), 자신의 삶을 가치 있고, 의미있고 번영하는 삶이라는 느낌을 동반하는 풍요로운 감정을 동반하는 자아. 자기 삶의 총체성과 의미를 성찰하는 자아로서의 인생평이다. 순간순간 경험하는 자아로서의 육아와, 회사일, 관계 문제와 선택의 순간들은 늘 벅차고 나를 소진시킨다. 특히 애들이 늦게 잠에 들 때면 몸과 마음에 스며드는 피로감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긍정적 감정과 그로 인한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오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족스럽지 못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해서 행복하다고 느끼려는 합리화, 즉 인지부조화에 의한 자기 합리화인지. 아니면 내게 작은 것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그것에서 의미를 발견해가는, 단조로운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안정감을 긍정적 감정의 연료로 쓸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자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평안함이 왔던 그 순간만큼은 합리화가 아닌 진실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비교도, 다른 무엇도 생각나지 않은 채 내가 속한 시간과 공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책을 통해 좀더 우리를 기쁘게 하는 행복에 대한 연구. 행복의 의미, 행복을 느끼는 자아의 종류와 같은 내용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의 과정들이 이 책의 이론과 언어로 해석되니 머릿 속 전구에 불이 켜지는 기분이다. 나 자신과 다른 이에 대한 이해, 그것에 기반한 일상 속에서의 선택, 주어진 시간 가운데 충실하며 좀더 현명하고 약삭빠르게 적은 에너지로 행복을 쟁취하는 일. 행복하게 살고 싶은 내게 정말 필요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