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는 글쓰기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그렇다고 아무나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선 행복을 추구하는 ‘나’를 내가 알아야 한다. ‘나’를 앎을 넘어서 나와 가장 가까운 내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살아가야 그것이 가능하다.
나를 수용하기까지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인생의 흔적을 남겼던 시간과 그 당시의 나를 돌아보고 성찰함으로써 비롯되는 치유가 필요하다. 저자는 그 치유가 ‘글쓰기’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내가 아는 의식 속의 나부터, 드러나지 않은 무의식의 모습까지 글쓰기를 통해 꺼내보고 살펴보고 직면하라고 한다. 그렇게 쓰고, 쓰다보면, 나에 닿고, 나의 근원에 닿고, 내 인생의 의미에 닿을 것이라고.
책장을 쉬이 넘기지 못했다. 두세 장에 한번 꼴은 책의 좁은 여백에 내 이야기를 적어넣었다. 이 책은 그렇게 날 끄집어냈다.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은 적어야 까먹지 않으니까 바로바로 적는데 그게 많아서 읽는 데 오래 걸렸다. 2014년, 아이를 갖고서 시작한 상담이 육아와 여러 사정으로 중간중간 공백은 있었지만 횟수로는 4년 차다. 이미 상담에서 건드려졌고 꿈틀꿈틀 나오기 시작한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좀 더 정교하고 자세히 발설되고 있다고 느꼈다. 난 이 책이 참 좋았다. 이 책을 쓴 저자가 좋았다. 끊임없이 “더, 더”를 외치며 채찍질을 해대는 이 세상에 “좀, 아 좀, 너 좀 돌아봐. 지금도 괜찮아.”라고 말해줘서 좋았다. 위로가 되었다.
특히 투사 부분에서 ‘무엇이든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건 상대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라는 문장. 이 문장이 이번 한 주 내게 큰 깨달음을 줬다. 회사에서 우리와 있을 때와 버전이 너무 다른 후배가 있다. 우리랑 실컷 리더를 욕해놓고 리더 앞에서는 교묘하게 질문도, 답도 호의적으로 받아치는 그 후배가 괘씸했다. 싫고 불편했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었다. 그런데 가만 보자. 내가 뭐라고 그 사람의 언사를 통제하려 하는 것인가. ‘그런 사람이려니~’ 하면 끝이다. 나는 왜그렇게 분노했는가? 화가 났던 회의 시간, 회의가 끝났지만 나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펜을 들었다.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도 사실 당황스러웠다. 사실관계, 내 감정, 흘러가는 대로 썼다. 문득 드는 생각. 나의 무의식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네가 화내는 그 모습 말이야. 네가 싫어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너 자신의 모습이잖아.”
맞다. 어린 나는 싫고 좋음과 상관없이 살아남기 위해 표현했다. 가족한테까지 사랑받고 예쁨 받기 위해서. 싫은 사람이어도 실리를 위해서라면 가면을 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가면 쓰고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중요했으니까. 내 느낌, 기분과는 상관없이 살아남기 위해 좋은 말을 해댔다. 어린아이가 알고 그랬을까, 본능적으로 그랬을 거다. 나는 그 때의 내가 불쌍하다. 그 시간을 지우고 싶다. 그런 환경에 처했던 내게, 처하게 놔둔 어른들에게 미치도록 화가 난다. 그래서 그 후배가 그렇게 미웠나보다. 내가 보기 싫어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그 시간들이 후배에게서 보여서. 인식하고나니 후배를 미워했던 그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이제 나는 그 때의 나를, 그 시간을 받아들여야하고 수용해야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여러모로 나의 깊은 곳을 비추고 끄집어낸 책이다. (2019.4)
적어놓은 글귀
P.18 글은 가장 먼저 그 글을 쓴 이를 위해 자기 역할을 다한다.
- 짠하다. 나의 글이 그렇구나. 내가 써낸, 나의 글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일한다니.
P.20 평범한 사람들이 온 마음을 다해 쓴 글들을 읽을 때 나는 강렬한 생명력을 느낀다. 이 세상에 절실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며, 의미 없는 글이 어디 있을까.
-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는 것에 시선을 뻇겨왔는데. 삶도 그렇지 않을까, 태어남 자체에 이미 절실함이 들어있다.
P.27 말 잘하는 부모에 대해
- 아이 앞에서 말 잘하는 엄마가 되지 않도록..
P.36-37 발설에 대한 내용
- 내가 회사에서 하는 말하기 또한 치유의 과정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의도성 말들 말고. 진솔한 태도로 말할 때 나의 진솔함은 내게 치유라는 보답을 가져다 줄거란 확신이 생긴다.
P.42 자아를 지켜줄 심리적인 근육
- 이 표현 너무 좋다.
P.45 생존은 우리 삶의 가장 본질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 살아야하나, 어떤 게 의미 있는 삶인가, 라는 사치스러운 고민을 할 틈도 없이, 불행하다거나 죽고 싶다는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오로지 생존의 산등성이를 기어오른 사람들에게 나는 많은 것을 배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리고 살아남는 데 그렇게 많은 생각이나 번민이나 두려움, 혹은 자격지심 같은 것들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 생존의 산등성이를 기어오른 사람들의 글을 더 읽어보고 싶다, 마주하고 싶다.
P.47 우리는 집단적으로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었지만 경제성장의 구호에 밀려 그것을 치유할 여력이 없었다. 우리의 조부모와 부모가 처절한 정신적 상처를 입은 당사자이며, 우리는 그들의 불안과 분노와 공포의 일차적인 피해자들이다.
- 우리집 이야기가 그렇지 않나 싶다. 전쟁을 겪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자식 잃고 얻은 마음의 병으로 그 자식을 괴롭게 하고, 그렇게 부모가 된 할머니의 자식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줬고.
P.49 우리는 살아 있는 고통의 역사 그 자체다.
P.51 삶에 밀착된 글쓰기
P.59-60 판단이나 편견 없이 누군가를 지켜보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다. 부모가 어떤 기대나 집착 없이 아이를 지켜봐주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 동료나 친구가 살아가는 모습을 어떤 훈계나 간섭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봐주는 것은 칭찬이나 격려보다 더 온전하다.
함부로 개입하지 않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사실 칭찬이나 격려는 기대에 부응하려는 마음을 마든다는 점에서 인간을 구속한다 바로 옆에서 주의 깊게 나를 지켜보지만 평가하거나 간섭하지 않으며 절박한 순간에 내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으까.
- 이 부분을 남편에게 읽어주었다. 서로에게 뿐만아니라 아이에게도. 칭찬이나 격려가 인간을 구속한다는 점 기억하기.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지 않고 좀 참기. 아, 사랑이란, 그것도 온전한 사랑이란 어렵다.
P.67 혼자보다는 함께일 때 훨씬 치유효과가 높다. 또한 자기에 대한 사랑도 결국은 타인의 진정한 사랑을 받으면서 훈련되고 획득되는 것이다.
- 빠른 길은 없다. 함께 가야한다.
P.78 개인의 상처를 단지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시키려는 심리학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 바로 이 공유의 장에서 이루어지 때문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책임은 사회에 물어야 한다.
- 이 분은 사회적이실 것 같다. 좋다.
P.81 인간은 고난 속에서만 성장하는 것일까? 의식이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의식의 확장이다.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좀더 많이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자기 자신을 활짞 열어 다양한 지혜를 받아들이고 좀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다.
- 고난에 대한 우월감을 지난 날을 돌아본다. 고난만이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P.84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격려하고 상대를 규정하는 칭찬이 아니라 내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기.
- 댓글 달 때 기억할 것.
P.86 우리 모두는 부모나 친구나 사회가 칭찬하는 바익대로 사느라 너무 지쳐 있다.
- 나도, 우리 아이도, 우리 남편도 이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P.105 상대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임을 확인하는 과정은 힘들고 가슴 아프다.
- 깊은 깨달음.
P.122 죽도록 미운 사람은 사실 죽도록 사랑하는, 또는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인 것이다.
P.125 삶의 의미가 갖는 중요성. 양심, 정의, 영성 같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도 타인을 배려하는 선행을 베풀었으며 죽기 직전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프랭클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인간의 실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를 상실했을 때 심리적인 문제가 생겨나며, 반대로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치료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사명과 의미를 찾아가기 위해서이며,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견뎌낼 힘을 갖게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목적성을 가진 존재다.
- 의미 앞에서 내가 이렇게 방황하는 이유. 고민하는 이유.
P.178 가끔은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보다 자기 한몸을 살아내는 생존자가 더 위대하게 느껴질 떄가 있다. 특히 무력한 어린아이가 생명을 위협하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생명력을 온전히 지켜냈을 떄 그렇다.
- 나는 위대하다. 내 삶은 눈물겹다.
P.195 인간은 사랑받을 때 자신을 가장 잘 성찰할 수 있다.
P.209 지금 나는 어떤가? 나는 나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지금의 일상에 이물감을 느끼지 않고 이 삶을 완전히 받아들이는가? 직장이나 사회에서 만족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가?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비전이나 진로를 찾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과거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작아진다.그런데 우리의 현재는 늘 불행하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단 한순간이라도 내적인 충만감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매달릴 뿐 영혼이 원하는 가치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나의 영혼이 원하는 가치란 무엇일까
P.212 마흔 살이 넘어서 핵심가치를 찾았고 그제야 내 일과 나의 가치를 일치시키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온전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온전하게자기 자신이 되엇을 때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현실에 비로소 안착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하려면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해야 한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곳을 거부하고 대신 과거나 미래에 가 있는 것이다. 그ㅓ므로 현재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 마흔이 넘어서. 천천히 가자.
P.267 누구든 글을 쓰는 이유는 가장 자기답게 소통하기 위해서다.
- 잊지말자. 멋내려고도 가르치려고도 아니다. 나답게 소통하기 위해서. 솔직해지자. 힘을 빼자.
P. 이제는 정말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한다. 농사꾼과 행상과 어부와 노동자가 글을 써야 한다. 공연히 어려운 말로 젠체하는 글이 아니라, 삶속에서 절로 터져나오는 내 생각과 내 느낌과 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글을 써야 한다. 그리하여 글이 온 세상에 강물처럼 흘러넘쳐야 한다. - 서정오, <글장이는 별종인가?>
- 글은 강물처럼 흘러넘쳐야 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나와 너의 이야기가 흘러넘쳐야 한다. 그렇게 넘치고 흘러 자신의 언어로 자기 아픔과 절망을 표현하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도 담아야 한다. 흘러넘쳐야 한다. 멋이 아닌 삶 때문에, 쓰지 못할 수 없기에 쓸 수밖에 없기에 써내는, 삶을 토해내는 글들이 내게도 넘치길 원한다.
박미라 | 치유하는 글쓰기| 한겨레출판 |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