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되지만 담배는 안돼.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던 아이들 이야기

by 한시영


“술은 되지만 담배는 안돼."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서 한 약속이다. 담배는 안되는데 술이 된다는게 살짝 의아하지만 우리는 그 약속을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지켰다. 초등학교 5학년. 학교가 끝나고 바로 집에 가지 않는 아이들은 운동장에 모였다. 그러다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여덟명’이라는 모임이 탄생했다. 국희, 슬희, 진수, 민진, 세향, 슬, 연지, 재인. 총 8명이라 이름도 ‘여덟명’.


중학교 수업이 끝나면 각자 집으로 향할 때도 있었지만 늦게 끝나는 사람을 기다려 완전체 여덟명으로 교문을 나서는 일이 많았다. 운동장에서 모여 앉아 목적없이 떠들기. 문방구 앞을 어슬렁대며 가지고 있는 동전을 모두 모아 꿀호떡이나 쥐포 사먹기. 날씨가 추워서 그것도 할 수 없는 날이면 부모님이 없는 집을 골랐다. 학교에서 거리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세향이네가 자주 후보에 올랐다. 여덟명이 들어가면 문 조차 닫을 수 없는 안방에서 우린 서로를 기대어 앉거나 엎드려있었다. “나 어제 오빠한테 맞았어.” 누군가 이야길 시작하면 다른 사연들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 “우리 엄만 또 술먹었어.” “우리 아빤 어제 일하다 다쳤대.” “우리 엄마도 아픈데.”


열 네살의 작은 몸 속에 사연들이 어찌나 많이 들어있는지 한번 시작한 이야긴 저녁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물론 재미있고 엉뚱하고 웃긴 이야기들도 많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아픔과 상처에도 진지했고 집중할 줄 알았다. 우리가 모인 곳에는 온 세상 가정사가 다 모인 것만 같았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저녁을 먹고 서로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TV 속 드라마 장면은 여덟명 중 단 한명의 집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이야길 하다가 엄마와 아빠가 퇴근할 시간이 되서야 마지못해 일어나서 현관 앞에 뭉탱이로 모여있는 가방 중 자기 것을 찾아 메고 각자의 집들을 향해 나섰다.


바람이 매서운 날이었다. 갈 곳이 없어 교복을 입은 채로 바람을 맞는데 슬향이가 결심이라도 한 듯 자기 집에 가잔다. 여덟명이 두세명씩 팔짱을 끼고 슬향이네 아파트로 향했다. 슬향이는 2녀 1남 중 둘째였다. “언니는 뭐든 잘해서 예쁨 받고 막내는 남자라서 귀여움 받아.” 그러면서 자기만 찬밥신세라고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부모님은 아닌지 긴장해서 나가보니 고등학교에 다니는 슬향이 언니다. "언니 우리 배고파." 슬향의 말을 들은 언니는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냈다. 김치를 한쪽씩 위로 들어올려 가위로 자르더니 버터를 녹인 후라이팬 위에 꽤 오랫동안 볶았다. 마지막으로 "애들아, 김치볶음밥은 이게 핵심이야." 하면서 빨간 케찹을 찍- 짜서 넣었다. 남색의 세련된 고등학생 교복에 요리까지 하는 언니의 모습을 우리는 한동안 넋놓고 쳐다봤다. 그러고서 겨우 인당 반공기가 나올까 말까한 양으로 배를 채웠다.


먹고 살기 바쁜 부모를 가진 우리는 그 빈자리를 서로로 채웠다. 어둑어둑한 거실에서 혼자 먹는 저녁밥이 싫을 때면 양은 적어도 함께 먹는 밥을 택했다. 어른들보다 어설펐고 서툴렀지만 서로의 아픔에 더 진지했고 귀 기울일 줄 알았다. 어른에게서 받은 상처를 꺼내어 놓을 수 있는 곳도 집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곳이었다. 김치볶음밥을 나눠 먹던 아이들이 이제 서른셋이다. 이젠 서로 뿐만 아니라 가정과 일터, 여러 관계들 가운데서 누군가를 돌볼줄 아는 어른이 되었고 빈자리를 채워주는 누군가가 되었다. 결핍을 겪어본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으로 또다른 이를 바라보고 그렇게 여전히 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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