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열음 Apr 22. 2021

어느 토요일 아침

몸도 마음도 우중충하다. 밝은 글을 읽고 싶어 화창했던 날 썼던 글을 꺼내본다. 이 날의 적당히 차가웠던 기온과 기분이 좋아 살짝 빨라졌던 걸음걸이를 기억하며.


어느 토요일 아침


토요일 아침 9시 40분. 집을 나선다. 10시에 예약된 도수치료를 받으러 간다. 운동량이 부족해서 이때라도 걷자 싶어 느린 걸음으로 20분-25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뛰어간다. 두꺼운 패딩이 왜이리 무거운지 잠깐 뛰고 오래 쉰다. 저 뒤에서 분명히 내가 앞지른 아주머니가 잠깐 쉬는 동안 날 앞지른다. 저 아주머니는 느긋하게 계속 걸으셨을텐데 이럴 거면 왜 뛰지 싶다. 그냥 일정한 속도로 걸을 걸 그랬나 싶다가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아주머니를 앞질러 보지만 횡단보도 앞이다. 빨간불이라 멈춰야 한다. 내가 힘찬 걸음으로 앞질렀던 아주머니는 곧 내 옆에 서있다.


오늘도 도수치료 원장님께 한소리 들었다. 접수를 하고 의사에게 형식상 진료를 본 후 수납을 한다. 그리고서 5층에 위치한 도수치료실로 올라간다. 올라가니 10시 7분. 지난주에도 늦어서 10시에 딱 맞춰 오지 말고, 10분 전에 오라고 하셨는데. 진료까지 보고 와야 하니 더 일찍 오라고 하셨는데. “더 빨리 오시라니까는…” 원장님의 한소리에 “아 열 시에 딱 맞춰오긴 했는데..”라고 변명해봤자 늦은 건 늦은 거다.


치료실 침대 위에 하늘을 보고 눕는다. 누우면 발끝이 하늘이 아니라  옆을 향한다. 외회전이라고 하던데.  발이  그렇지만 유독 왼쪽 발이  바깥으로 회전한다. 원장님 말로는 왼쪽 골반이  틀어졌다고 한다. 1시간가량 뼈를 맞추고 누르고, 전기 치료를 받는다. 어쩔  잠이 드는데, 잠에서   잠이 들었던 티를 내지 않으려고 “흐흠소리도 내고 손가락을 까딱까딱 해본다. 치료가 끝나면 탈의실에 가서 온열기를 켜고 옷을 갈아입다. 갈아입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탈의실이 너무 춥다.


병원에서 나오니 집을 나섰을 때와는 다르게 기온이 한층 더 높아져있다. 걸어가면서 뭘 살까, 길을 건너서 오른쪽 길로 걸어갈까, 그대로 왼쪽 길로 걸어갈까 하다가 왼쪽 길을 택했다. 걷다 보니 꽃집이 나온다. 꽃집 앞에 놓인 화분들, 그 속에서 핀 꽃들을 보고 “어떻게 너무 이뻐.”라는 말이 밖으로 나왔다. 곧장 화원으로 들어가 아저씨께 물었다.


올망졸망 모여있는 꽃들이 아가들같아


“아가들이랑 키우려고 하는데 어떤 게 좋을까요?” 하니, 앞에 동글동글한 수선화와 히야신스를 권해주신다.


 “수선화는 향이 나는 게 있고 안 나는 게 있구요 이 히야신스는 여러 가지 색이야. 흰색, 보라색, 빨간색, 아직 꽃은 안 폈지만 펴면 이쁠 걸요.”


보라색 히야신스와 향이 나는 수선화 두 개 화분을 골라서 계산하니 7,000원이 나왔다. 화원 앞에서 아저씨가 카드로 계산을 하는 동안 화알짝 피어있는 꽃들을 보니까 마음이 뭉클해진다. 활짝 편 동백꽃이 반가워 사진도 찍고, 올망졸망 작은 화분에 담겨 일렬로 서 있는 꽃을 보자니 어린이집에서 산책하러 나와 일렬로 서 있는 아가들이 생각나 한참을 바라봤다.


하늘색 반투명의 얇은 비닐봉지에 넣어주셨는데 부피가 작아 그리 무겁지 않았다. 가는 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남편 생각이 나서 빽다방에 들러 커피를 주문했다. 여자 사장님이 묻는다.


화분 넣고서

“저 봉지 안에 든 것좀 봐도 돼요? 제가 꽃을 좋아해요.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물으신다. “홍제역 앞에서 샀어요.” 여기서 멈추면 되는데 아까 본 꽃의 여운이 남고 몽글몽글한 꽃망울이 마음속에서 결국 터져 주인아주머니에게


“이 사진 좀 보세요 저기 화분들이 올망졸망 일렬로 있는 게 너어-무 예뻐서 찍었어요 어때요?”


하니 이 아주머니 역시 낭만을 아시는 분..


“어머 너무 이쁘다 어떡해. 이건 동백꽃이죠? 동백꽃이 피다니 따뜻해졌나 보네. 동백은 키우기가 어려와. 내가 저기 밑에 남쪽에서 살았그든. 울산이라고 알제? 거기서 살아야 거우 필까 말까, 키워봤더니 꽃 맺기도 힘들드라구.”


빽다방 사장님께 보여드린 동백꽃


꽃을 좋아한다던 사장님. 내가 보여준 사진에 그렇게 반응하니 이 꽃이 나만 아니라 그 아주머니에게도 기쁨이 되었다는 게 좋고 뿌듯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반동을 받아 가벼웠다. 여전히 공기는 차가웠어도 햇살은 밝아서 볕이 외투를 뚫고 마음까지 비춰주는 듯했다.


집 도착 전에 닭강정을 사 오라는 남편의 부탁에 닭강정 집에 가니 이제 막 오픈을 해서 새 기름에 불을 올리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첫 기름에 튀겨진 중간 매운맛과 순살 후라이드 각각 한 박스씩. 왼손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화분을 바리바리 들고 집에 가는 길 내내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집에 오자 애들아 엄마가 “선물사왔어, 꽃이야!!” 하니까 한두 번 코를 대고 두 놈이 킁킁대다가 꽃냄새보단 기름 냄새가 더 좋은지 금세 사온 닭강정 봉지에 코를 맡고 “한입만 한입만” 거린다. 봉지를 높게 가슴 높이까지 올리고서 “이따 밥 먹을 때 반찬으로 먹을 거야~” 했지만 냄새에 홀린 듯 아이들이 내 허리춤으로 다가온다. 결국 닭강정을 집어 들고 입술을 오므려 호호 불어 아이들 입에 하나씩 넣어줬더니 열중해서 씹는다.


그리고 정확히 2주 뒤 토요일 오전 10시에 도수치료를 받으러 동일하게 정형외과를 찾았고, 왼쪽 길을 택해 걷다가 꽃집에서 호주 매화라는 4천 원짜리 화분을 또 샀다.


지난번에 사장님과 꽃 이야기하느라 카드까지 두고 온 백 다방에서 신용카드를 찾았다. 빽다방 사장님은 여전히 친절했다. 햄버거가 먹고 싶어서 남편것과 내 것 두 개 와퍼 세트를 포장해왔다. 집에 도착해서 아이들은 밥 주고 우리는 아이들 밥 먹는 동안 싱크대 앞에 서서 몰래 햄버거를 먹었다. 결국 이게 무슨 냄새냐는 첫 아이의 민감한 후각으로 인해 아이들 반찬으로 감자튀김이 추가됐다.


잔잔한 토요일을 기록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라는 글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