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살 취준생의 일상 수필
당신은 꼰대인가.
꼰대 낙인은 불명예스러운 무언가가 되어 나이 든 세대들을 옥죄기 시작했다.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 꼰대를 정의하기에는 다양한 기준들이 있지만, 보통은 “불통”, “고집” 등의 키워드로 집약된다. 기준이 어떻든 꼰대는 부정적이고 불명예스러운 단어이기에 모두들 기피했고, 침묵하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꼰대 테스트, 꼰대 6하 원칙(내가 누군지 알아, 뭘 안다고, 어딜 감히, 내가 왕년에, 어떻게 나한테, 내가 그걸 왜)을 기준으로
스스로 꼰대인지 돌아보기도 했고, 커뮤니티나 인터넷 게시판에는 자신의 행동이 꼰대냐며 주변에 묻기도 하였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들어서고, 꼰대질이 이제는 명문화된 행위로 규정되기 시작했다.
사라져야 할 악폐습과 어른의 조언이라는 모습 사이에서 탈꼰대는 침묵의 방향으로 규정되기 시작했다.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는 하나의 격언이 되었다.
역꼰대. 젊은 꼰대. 꼰대의 기준은 나이가 아니다.
반면에 역꼰대 현상 역시 대두되었다. 젊은 꼰대, 역꼰대 등으로 불리는 이 무리 혹은 현상은 꼰대와 다를 바 없는 기준을 가졌지만 나이만 젊다는 데 있다. 본인이 옳다고 믿고,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하대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본인들이 극도로 꺼려했던 꼰대의 모습과 닮아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모든 말을, 그것이 잔소리이든 진정한 조언이 든 간에, ‘꼰대’로 규정하고 소통을 거부한다. 앵무새처럼 ‘꼰대’라는 말만 반복한다 하여 ‘꼰무새’라고 불리기도 한다. 꼰무새의 행위는 세대 간의 소통을 단절한다.
근접학과 꼰대
에드워드 홀의 근접학에서 친밀도는 물리적 거리에 반영된다. 4단계로 구분되는 이 거리는 친밀한 거리, 개인적 거리, 사회적 거리, 공적인 거리로 나뉜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를 반영하여 심리적 거리로도 조성된다. 꼰대가 문제 되는 이유는 적절한 무관심의 거리를 자의적으로 침범해서이다. 궁금하지도 않은 본인의 과거와, 알려주고 싶지 않은 사생활을 캐묻는다. 꼰무새는 관심의 거리마저 거부한다. 가장 먼 단계인 공적인 거리마저 그들은 거부한다. 꼰대와 꼰무새는 극단적으로 다르면서 닮아있다. 자의적인 관심의 거리 침범과 극단적인 관심의 거리의 대립인 셈이다.
꼰대의 낙인을 두려워하는 세대들은 오히려 꼰무새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간다. 그들은 일말의 관심조차도 속으로 숨기고 소통을 거부한다. 미투 확산에 따라 아예 일말의 여성과의 접촉을 거부하려는 변형된 펜스 룰과 비슷하다. 꼰대로 낙인찍히는 것을 두려워한 세대들은 아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단 낙인뿐만 아니라 인터넷 게시판에 널리 알려져 자칫 더 큰 소문으로 번질 수 있다. 주변의 평판을 특히 고려하는 한국의 문화 상 불명예 낙인은 개인에게 치명적이다.
적당한 관심의 거리는 존중이다. 이를 자의적으로 침범하면 꼰대가 된다. 역꼰대와 꼰무새는 일말의 침입조 차 거부한다. 이를 존중받고 싶어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소통의 거부는 단절로 이어진다. 개인과 개인의 단절뿐만 아니라 세대와 세대가 단절된다. 꼰무새의 행위는 꼰대 낙인을 두려워하는 세대들을 더욱 키운다. 서로 간의 성벽 안에서 거리를 좁힐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결국 단절은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그뿐이다.
그간의 꼰대에 대한 당당한 언행은 사이다로 추앙받았다. 시대가 달라졌고, 어른의 조언은 공감을 얻지 못했다. 세계가 단선형의 발전 경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장과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취직하는 시대는 사라졌다. 월급만 차곡차곡 모으면 집을 살 수 있는 시대 역시 사라졌다. 사라진 것인지, 강탈당한 것인지 청년 세대들에게 노력과 도전이라는 조언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청년세대가 어른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유튜브에서 쓴소리 영상은 인기를 끌고 있다. 멘토의 필요성 역시 느끼고 있다. 다만 그들의 멘토는 이제 직장상사나 학교 선배보다 책의 저자나 유튜브의 영상 콘텐츠가 되었다. 근접한 거리의 쌍방향 소통하는 멘토보다, 먼 거리의 일방향 멘토가 더 인기를 끈다.
사회적인 굴레를 벗어나서
일부 기성세대들은 스스로 꼰대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기존의 꼰대와는 달리 할 말은 하지만, 상대방을 인정하고 공감하여 노력하려는 것이다. 따뜻한 꼰대, 꼰데레 등의 말을 낳은 것이 그 반증이다. 겉으로는 까칠게 굴어도 속으로는 챙겨주는 유행어 츤데레에 꼰대를 합성한 뜻이다. “나는 그냥 꼰대로 살기로 했다” 책이 출판되듯이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기성세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대에 억지로 맞추려 하다가는 교류가 단절되고 불편함만 증폭될 뿐이다.
젊은 꼰대들 역시 젊은 세대에서 기피 대상이다. 2030 내에서도 세대 간 단절이 쉽게 일어난다. 개인주의는 관심을 거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개인주의와 쿨함에 취해 꼰무새로 무장한 그들은 누군가에게 역시 꼰대로 낙인찍힐 뿐이다. 꼰무새 역시 꼰대와 마찬가지로 단절되고 소외될 뿐이다. 쌍방향 소통과 적절한 관심의 거리는 서로의 노력으로 조성된다. 대뜸 관심의 거리를 좁혀나가기보다 차근차근 서로 간의 합의를 통해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현대사회는 점점 파편화되어가고 집단 간의 갈등도 첨예해지고 있다. 2030 내에서도 젊은 꼰대와 역꼰대는 갈등의 불씨가 된다. 꼰대와 꼰무새로 나타나는 세대 간의 갈등은 심리적 거리의 절충으로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서로의 심리적 거리를 잘 파악하고, 찬찬히 거리를 좁히도록 문을 두드려야 한다. 다짜고짜 벌컥 열어젖히는 행위는 환영받지 못한다. 침묵은 단절이다. 아주 작은 관심에서부터 교류의 씨앗을 심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