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내 이름이 쓰여진 이름표를 목에 달고 다니는 것
지난 25일부터 29일까지 4박 5일 간 시모노세키에 다녀왔다. 교통은 부산-시모노세키 간에는 부관훼리를 이용했고 일본에 가서는 버스와 도보 이동이 주였으며 배를 이용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정확히 2박 3일간 머물렀다. 사실 이를 여행이라 칭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교에서 보내주는 ‘문화탐사’고 그 일정도 아마 학교 측에서 짠 것일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번 여행을 통해 느꼈다. 다신 패키지여행은 가지 않으리라.
일정 도중에 무리에서 일탈하지 않은 건 같이 간 친구들 덕분일 것이다. 최악일 뻔했던 여행이 그들 덕분에 졸업여행 겸 그래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내 돈을 들여서라도 좋은 사람들과 자유롭게 차라리 더 고생스러운 여행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1. 여유없이 빡빡한 일정
배에서 내리자마자 간 곳은 조후 모리 저택, 조후 정원이었다. 사전에 알아본 정보에 따르면 전통적인 저택과 일본 상류층 특유의 정원 분위기가 매력적인 곳이었다. 흐리고 습도 높은 날씨가 심상치는 않았지만 괜찮았다. 여행은 그 어떤 날씨도 여행지 특유의 낭만으로 탈바꿈시키니까. 그런데 정원에 들어서면서 나는 왠지 모를 갑갑함에 휩싸이고 말았다. 앞뒤로 둘러싼 수십 명, 그러니까 함께 여행 온 학우들의 줄지은 행렬에 정원의 풍경이고 뭐고 안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행렬의 맨 앞과 뒤를 담당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애써 무리와 떨어져 보려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사실 종강 후 바로 계획되어있던 여행이었을뿐더러 친한 이들과 가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필자가 여행에 거는 기대가 없었다고는 말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그 기대감이 첫 관광지에서 느낀 실망감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여행이 아닌 일종의 퀘스트처럼 늘어놓은 일정과 그런 일정이 지체되어선 안된다는 압박감은 여행을 여행답지 못하게 만든다. 으레 많은 곳을 들렀다는 사실은 그것이 도장깨기에 불과할 뿐 여행으로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2. 비효율적인 이동시간
자유여행이라면 관광지를 찾아 헤매는 시간마저도 낭비가 아닌 경험이 된다. 낯선 곳에서 난관에 부딪쳐 스스로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성장이니까. 이동시간마저도 여행의 일부다. 그런데 버스 타고 다니는 패키지여행이라면? 먼저 언급한 자비 없는 일정은 사실 여행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 아닌가. 비록 나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일정을 정하고, 식사 메뉴를 정하거나 이동수단이 있고 통역의 어려움을 해결해줄 가이드가 있다는 것은 모든 고민과 갈등의 과정을 최소화시켜 관광지를 둘러보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그 마저도 관광지 간에 이동하는 시간에 우리의 여행 일정이 치중되어 있다면 나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고 말하겠다. 하마터면 문 열지 않는 날에 찾아간 아키타 상회(결국 마지막 날 다시 갔다), 파장하고서 찾아간 가라토 시장이라든지, 바쁜 일정에 쫓겨 훑듯이 지나친 신사들은 텅 빈 영화관에서 영화가 아닌 엔딩 크레디트만 본 듯이 허무했다. 좀 고생스러우면 어떠한가, 어차피 집 나오면 고생인걸. 그래도 이동시간 2시간에 관광시간 1시간은 비효율적인 처사다. 나는 지난 여행을 돌아봤을 때 버스에 있던 시간들과 갓길을 걷던 의미 없는 시간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떠오르지는 않았으면 한다.
3. 가이드의 전문성 부재
작년 5월 프라하에서 가이드 투어를 한 적이 있었다. 아침 오전 일찍부터 시작해 오후까지 이어지는 반나절 일정이었고 예약 없이 진행되는 번개 모임이니 만큼 모든 이동은 도보로 했다. 5월이었지만 프라하의 날씨는 30도를 넘나들었고 휴식 한번 없이 땡볕 아래에서 설명을 듣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내가 여행 중 가장 잘한 일이 가이드 투어라고 생각한다.
체코의 아름다운 풍경에서 담아갈 것이 경치뿐 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역사와 민족의 아픔에 대한 것들도 있었다면 좋겠다며 건물과 도시에 담긴 역사를 이야기하는 그녀의 입에서 지대한 광장에서 체코의 독립을 위해 스러져간 청년들의 이름이 나올 때 나는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 날이 내 생일이었는데 나에게 그런 전율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선물해준 그녀가 너무 고마웠다.
이런 일화 덕분에 내가 가이드에게 걸었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서른 명은 족히 되는 대학생들을 인솔하기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4박 5일 간 고생했던 가이드에게 진심으로 고맙지만 관광지에서 관광안내판을 읽어주거나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모습은 그다지 신뢰가 가질 않는다. 패키지여행의 단점이라기보다는 개개인의 능력치이긴 하나 사실 이번 여행을 실망시킨 가장 큰 요소였다. 일정은 융통성이 없었으며 이동도 효율적이지 못했고 사실 첫 날을 제외하곤 거의 듣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했던 어떤 설명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같이 갔던 교수님이나 설명을 보태주었던 박물관 관장님들이 아니었다면 기억에 남는 유물이나 장소가 있었을까 떠올려본다.
수업이었기 때문에 자비 한 푼 들지 않았을 뿐이거니와 학교 입장에서는 안전이 최우선 고려 사항이었으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에서 내가 패키지여행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지난 여행을 회상하며 학교 관계자들과 선생님들과 함께 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앞서 든다. 내가 과연 이 여행을 평가할 만한 주제가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만약 자비를 들여간 여행에서 위와 같은 경험을 했다면 나는 브런치가 아닌 여행사에 글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쓴 글이 어떤 이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았으면 한다. 전적으로 내가 갔던 여행 기준이며 모든 패키지여행이 그렇다는 건 아니니까. 다신 패키지여행을 안 가겠다고 했지만 혹시 또 모른다. 자유여행이 줄 수 없는 안정감과 편리함들이 그리워져서 언젠가 내 손으로 찾게 되는 날이 오게 될지.
하지만 당분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