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며 먹고 산다는 것의 의미
2018년 12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을 대학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졸업은 축하받아야 마땅할 일이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러지 못했다. 졸업과 동시에 학생이라는 최소한의 울타리가 거둬진 기분이랄까. 치열하고 또 험난하기에 그지없는 세상 속으로 내쳐진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단군이래 존재하지 않았던 부모 세대보다 못 사는 세대에 해당하는 사람이 바로 나니까. 그중에서도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해 내가 과연 뭘 해 먹고살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아지던 찰나였다.
이러한 의구심이 아이러니한 것은 분명 내가 목적의식을 갖고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려운 시절에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다름 아닌 책과 TV 다큐 프로그램, 모양만 달랐을 뿐 분명 텍스트에 기반한 콘텐츠였으니 나도 후에 콘텐츠로 세상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곳에 힘이 되어야지 싶어 선택한 것이 이 길이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스스로에 대한 확신은 무뎌지던 때였다. 힘든 시기였다. 마음에도 없는 대학원 진학까지 고려하니 마음이 더 지옥 같았다.
다행히도 머지않아 면접을 봤던 회사에서 연락이 왔고 바라던 대로 글을 쓰며 먹고사는 일을 하게 되었다. 취직을 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1. 다행히 바라던 대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고 2. 많이 벌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됐으며 3. 공공기관이라 워라벨이 가능하다는 데에 바라던 것보다 충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동안 가졌던 스스로에 대한 물음과 진로에 대해 의심하면서도 끝끝내 나다움을 버리지 않았음에 다행스러움을 느낀다. 요즈음 내 삶의 모습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만족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한 구석이 저리다. 그간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기대와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갈 자유를 포기하고자 했는지. 글도 쓰고 돈도 벌지만 삶이 그렇게 팍팍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는 바람이 스스로가 어쩜 그렇게 파렴치한처럼 느껴지던지. 내가 바라던 삶은 펜트하우스도 아니고 번지르르한 승용차나 명예도 아니고 그냥 이 정도의 삶뿐이었는데. 치킨집이 치킨을 팔아 장사를 하듯, 나도 내가 쓴 글로 벌어먹으며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동안 스스로가 욕심이 많게 느껴져 괴롭던 시간을 떠올리면 괜스레 억울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글을 쓰고 싶은 또는 글을 쓰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유 있는 삶과 최저시급 수준 이상의 보상 중 어느 하나는 포기하기에 마련이니까. 어쩌면 글을 쓰며 살아간다는 것은 두 가지 모두 희생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렇다. 실제로 문예에 등단한 작가들까지 포함해 글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 인생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있다. 어떤 직업이 안 그렇겠냐만은 쓰는 이들에 대한 세상의 눈초리는 유난히도 차갑게만 느껴진다.
그렇기에 나는 ‘글을 쓰고 싶다’ 거나 ‘글을 쓰고 있다’는 이유로 세상에 소외감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이들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아프다. 점과 선, 자음과 모음, 또 수천 개의 단어 중 고르고 골라 타자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일은 소외받아야 마땅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만족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현재의 삶도 좋지만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글을 쓰고 더 많은 보수를 바라며 대단한 대접을 받기를 꿈꾼다. 조금 더 뻔뻔해지고 욕심부리며 많은 것을 바라고 삶을 살아가야겠다. 쓰는 이들이 모두 삶에 대한 욕심을 부리며 글을 쓰는 것이 당연한 날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