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이직 고민기
두 번째 이직의 실패를 인정하고 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와 맞지 않는 회사라는 걸 인정하고 내려놓자 복잡함은 없어지고 명료해졌지만 일이 손에 안 잡히는 부분에서의 문제가 발생했다.
일이 손에 안 잡히니 집중이 안되고 회의시간에도 몰입할 수 없었다. 점차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회사와 나 모두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여기가 아닌 건 알겠는데,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다시, 어떤 회사를 가야 하나. 당장 떠오르는 회사들이 많았지만 그보다는 나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빡빡한 가이드라인을 잡기보단 일(work)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가치관을 떠오르는 대로 그냥 부담 없이 편하게 적었다. 편하게 적고 보니 다음 질문의 답들을 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나에게 중요한 것/잘하는 것/힘들지 않은 것 ↔ 중요하지 않은 것, 잘 못하는 것, 힘든 것
내가 포기/극복할 수 있는 것 ↔ 포기/극복할 수 없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 하기 싫은 것
나는 어떨 때 일이 재밌는지 ↔ 재미없는지
가고 싶은 회사들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나를 객관화한 자료 기준으로 나와 잘 맞을지를 생각해 봤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앞설 때마다 조금 더 차분하고 냉정하게 나와 잘 맞을지부터 고민했다.
아래는 실수를 줄이는 결정을 위해 내가 뽑은 세 가지 질문이다. 떠오르는 회사가 있더라도 이 질문의 3가지에 가장 부합하는 회사가 아니라면 한번 더 깊이 생각해 보기로 했다.
Q1. 내가 재밌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인가?
객관화하고 보니 역시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일에 대한 흥미, 즐거움이었다. 이직하고 나서 지금의 회사에 적응하기 위해서 일은 원래 재미없는 것이고 다 돈벌이로 다니는 거라고 일보다 더 중요한 가치관이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바보 같은 짓이었다. 나는 일을 재밌게 해 봤던 사람이고 그 즐거움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 재밌게 일했던 경험이 있기에 그때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일부 조건들을 구체화했다.
- 빠르게 개선하고 결과물을 지표로 볼 수 있어야 할 것
- 책임도 있되 권한도 주어져야 할 것 등등
Q2. 내가 잘하는 것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인가?
1번과 비슷하지만 내가 잘하는 것을 잘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인지도 중요했다. 재밌게 일하더라도 내가 잘하는 것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있어야 성과로 이어지고 성취감과 보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선 당연한 이야기지만 1)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 지부터 객관적으로 알아야 하고 그다음 2) 그걸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인지를 알아봐야 한다.
(X) 나는 시키는 건 누구보다 잘하는데, 능동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환경이다.
(X) 나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하는 걸 잘하는데, 정해진 걸 해야 하는 환경이다.
(O) 나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하는 걸 잘하는데, 능동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환경이다.
Q3. 얼마나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곳인가?
이건 지금의 내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넣었다.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높지도 않은 데다가 얼마 전 적응하는데 드는 에너지가 100이라면 그 100을 거의 다 써버린 나에게는 큰 에너지가 드는 환경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미 난 상반기를 의미 없이 흘려보냈다. 새로운 회사의 적응까지의 또 시간이 걸 텐데 이 시간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단 생각을 했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부가조건을 덧붙였다.
같은 직무명이라 하더라도 직무가 최대한 비슷해야 할 것 (이번 이직실패의 가장 큰 레스런)
총보상을 줄여서 가진 말 것
출근거리 1시간 이상은 가급적 지양할 것. 삶의 질이 떨어짐
이러한 기준을 정하는 데에는 최근 읽은 도그냥님의 책에서 읽은 미니마이저 전략이 도움이 되었다. 미니마이저전략이란 - 최소조건을 정하고 그 조건에 부합하면 빠르게 결정하는 전략
나를 객관화하고 선택의 기준을 정하고 나니 빠르게 결정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고 한결 마음 편하게 다음 이직처를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객관화하는 것도, 가장 우선시할 기준을 정하는 것도 나름의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일이지만 한번 정리하고 나면 간결해진다. 머릿속이 복잡할 땐 가장 좋은 건 글로 쓰고 내가 그 글을 다듬고 정리하는 과정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기준에 부합한 회사들을 가고 싶다고 다 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다행히 나의 부적응기(?)를 직/간접적인 소식으로 알게 된 2개의 회사에서 면접 제안을 주셨고 여기에 눈에 밟히는 한두 개의 회사를 더 얹어서 같이 고민해 보기로 했다.
p.s 평소에도 회사와 연애는 참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번 경험을 통해 더더욱 공감된다.
만나기 전과 썸 초반에는 좋은 점만 보이는
오만정이 다 떨어지고 이별해야 후회가 없는
'좋고 나쁘고' 보다는 '나와 잘 맞는 안 맞는' 수식어가 더 적절한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