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없는 날도 살아진다....
산들의 여왕이라 불리는 스위스 리기산은 루체른 근방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산이다. 피츠나우행 빨간 산악열차를 타고 해발 1797m의 산을 오르다 보면 듬성듬성 자연을 벗 삼은 아담한 집들을 엿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차가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를 때 마다 나타나는 평화로운 집들이 선사하는 고요함보다 ‘여기에 집을 짓고 어떻게 살지? 생필품은 어떻게 사가지고 올까? 아이들 학교는 어디로 다니지?’ 하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여행을 떠날 때 분명 두고 왔을 거라 생각했던 나의 사소한 걱정들이 슬며시 따라 붙은게 분명하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들로 가득찬 머릿속이 비워질 때 즈음 리기산 종착역에 도착했다. 눈으로 덮인 수많은 산들은 곳곳의 호수 함께 새하얀 빙하에 와 있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그리고 햇빛을 반사하는 빙산의 반짝임이 눈을 시큰하게 했다.
종착역에 내려 조금 걷다 보면 산을 오르고 있는 사람 모양의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여기 까지 나를 이끌어 준 이정표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안내 하는 또다른 이정표를 잠깐 생각 해 본다. 삶을 이끌어주는 것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꿈’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만난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에는 흔하디 흔하다 생각했던 ‘꿈’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살다보니 어느순간 ‘꿈’이라는 것이 ‘이정표’가 될수는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나의 앞에도 이정표는 언제나 있었지만 그 때 상황이 알려준 방향대로 갈 수 없을 때도 있었고, 아무 이유 없는 경로 이탈도 종종 경험했다. 잠시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길에 오르는 여행자들의 이정표가 궁금해 진다. 때로는 지도도, 이정표도, 나침반도 없이 유유자적 흘러가는 데로 걷다 마주한 곳에서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인생의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깨닫기도 한다.
오늘 나에게는 아무런 계획도, 방향을 알려주는 무엇도 없었고 굳이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늘 내가 아침이라며 눈 뜬 시간은 오후 3시, 중간중간 눈이 떠지기도 했지만, 그동안 미루어 왔던 잠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던 핸드폰도 오늘만큼은 조용했다. 오랜만에 주어진 고요함이다. 무작정 기억을 더듬어 글 한 페이지를 쓰고 나니 이미 오늘의 해는 사라지고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나에겐 쌓였던 피로가 조금 풀어졌고, 기억이란 창고에 먼저 치럼 묻어 놓았던 여행의 일부를 찾아내어 글로 옮겼다.
그래... 오늘 나는 이것으로 만족한다. 내일은 내일의 이정표 대로 살아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