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Pancras 역사 내 카페 코스타 앞에 피아노가 한 대 있고, 피아노에는 Play Me, I'm Yours라는 장난스러운 문구가 쓰여 있다. 유동인구 많은 이곳에 누가 앉아서 피아노를 칠까 싶지만 딩동 딩동 거리는 아가부터 열정적으로 연주하고서 홀연히 바람처럼 사라지는 집시까지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일요일 밤 아홉 시가 넘어가는 시간.
왁자지껄 십 대 남자아이들 패거리가 한참 장난치고 떠나간 자리에 회색 양말을 종아리까지 한껏 끌어올린 반바지 차림의 아저씨가 앉는다. 포스가 심상치 않다. 재야의 고수던가, 아님, 빅재미를 안겨주던가.
자, 드디어 시작. 백팩을 멘 채로 몸을 좌우로 흔들며 오블라디 오블라다를 신나게 연주하시는 아저씨의 손놀림은 피아노를 전혀 알지 못하는 나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오 마이 갓. 다 틀려가면서도 흥겹게 끝까지 연주를 마친 아저씨는 드물게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박수 세례에 앵콜 신청까지 받았다. 나도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저씨 브라보!
용감무쌍한 이 밤의 주인공은 가방에서 쪽지를 꺼내 플레이리스트를 확인하고서는 그 이후로 서너 곡을 거침없이 연주했다. 피아노 막귀인 내가 들어도 조마조마한 솜씨지만 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희한하게 즐거운 시간. 아저씨 뒤 편에 서서 흔들흔들 춤을 추던 한 남자는 피아노 연주와 전혀 상관없는 노래 소절 'Oh, Happy day!'를 두 번 지르고 나서 제 갈 길로 떠나갔다. 참으로 기이하고도 유쾌한 장면이었다. 아저씨도 준비한 곡들을 모두 마치고 셀프로 박수를 유도하고서는 멋지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이 늦은 시간, 난 여기서 뭐 하고 있는가 하면.
집에 가기 전에 뜨거운 디카페인 커피 한 잔 마시며 읽기나 쓰기 좀 해볼까 했던 건데, 아티클을 펼쳐만 두고 유로스타 타고 오는 사람들 구경에,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한 시간째 맑게 머리를 비우고 있다. 집에 가야 하는데 긁지 않은 복권처럼 다음 레퍼토리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여 밍기적거리고 앉아 있다. 좋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