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성상회 Sep 20. 2020

고맙습니다.

어느 날의 감사 일기

새벽에 맞춰 놓은 알람을 듣고서도 흘려보내고, 겨우 부스스 일어난다. 유산균을 먼저 한 입에 털어 넣고, 양배추즙에 알약 두어 가지를 챙겨 들고 책상 앞에 앉아 프랑스어 공부를 한다. 여기에 오늘부터 추가되는 아침의 루틴은, 감사하기. 종교 없는 내가 갑자기 감사기도라는 것을 해보자고 마음먹게 된 데에는 다소 구차한 사연이 있는데, 여전히 밥을 잘 먹지 않는 우리 딸을 향한 화를 미리 삭여,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함이 바로 그것이다.


어쨌거나 오늘도 하루를 이러구러 넘기고 늦은 오후 혼자 찾은 카페에서, 일기장을 뒤적이다 지난 겨울에 썼던 감사일기를 발견했다. 조금 놀라웠고, 피식 웃음이 났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19. 12. 21.


감사합니다. 복동이처럼 고운 아기를 이만큼이나 온전히 내 품에 돌려주어서 고맙습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려고 노력하는, 나를 사랑해주는 남편이 내 옆에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돌아갈 직장이 있어 소비생활을 하면서도, 사실은 마이너스이면서도 서럽지 않습니다. 고맙습니다.


어찌 되었건 우리 딸이 말할 수 있는 아기라는 사실이 저의 동아줄입니다. 생명줄입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추스를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가끔 허락되어 다행이에요. 고맙습니다.




복동이를 만난 지 43개월이 다 되어간다. 엄마가 되어 행복했지만 솔직히 자주 절망했고 화도 내다가 정 마음이 회복되지 않는 시점이 되면 하는 수 없었다. 자세를 한껏 낮추어서, 그래도 고맙습니다. 이만큼이라도 사실은 감사하고 있어요. 하고 계속 되뇌었다. 악다구니를 써도 상황은 나아지는 법이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내 마음이 너무 피폐해지기 전에 억지로 끄집어내는 비겁한 감사였지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고맙습니다.’ 라고 적고 내가 가진 것들을 헤아려 보고 있다. 두 달이 지나면 그토록 기다리던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가게 된다. 수술에는 많은 변수가 있으므로 수시로 불안해지는 마음을 잘 붙들어야 한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시간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고, 뚜벅뚜벅 내 갈 길을 걸어가기로 한다.




이전 09화 복동이의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