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층을 너머 건너편 해안으로
혹시 영국 지도를 유심히 봐 보신 적이 있나요? 북쪽의 스코틀랜드를 가만히 보면 동서로 비스듬하게, 땅을 두 조각으로 나누는 선이 보입니다. 마치 체스 기물 중 비숍의 뒤통수처럼요.
영국에 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저게 뭔지 항상 궁금해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오늘 이 선의 정체를 소개한 뉴스 기사를 발견했는데요. 이는 다름 아닌 '그레이트 글렌' 이라는 거대한 협곡이라고 합니다.
그 정체를 알고 나니 여러분께도 이 단층선을 소개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습니다.
우선 이 단층선의 형성에는 당연하게도, 자연의 힘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아주 오래전, 거대한 지질학적 힘에 의해 이 부분의 지각에 기다란 균열, 약한 고리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수억 년의 시간 동안 빙하가 이 약한 부분을 따라 흘러내리며 깊고도 긴 계곡을 파냈습니다. 네시라는 괴물로도 잘 알려진 네스호도 그레이트 글렌의 일부랍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지금의 그레이트 글렌은 자연이 만든 그 모습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영국인들은 거친 파도가 치는 스코틀랜드 북부를 도는 항로도 피할 겸, 그레이트 글렌을 관통하는 칼레도니아 운하를 만들었습니다. 자연이 스케치한 그레이트 글렌은, 인간의 의지로 깎아 낸 운하로 채색되어 스코틀랜드 동쪽과 서쪽 해안을 잇는 연결선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선'을 긋는 모습들도 이와 닮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익숙했던 세계와의 연결고리가 점차 약해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혹은 더 이상 예전의 방식으로는 나아갈 수 없음을 직감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새로운 경계선을 그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곤 합니다.
그레이트 글렌을 보다 보니 저에게는 퇴사라는 단층선이 떠올랐습니다. 안정적이고 보장된 세계와 단절하고, 무엇하나 확실하지 않은 길로 뛰쳐나온 지 이제 1년 하고도 몇 달이 더 지났습니다.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말도 있지만, 그 새로운 문이 언제 나타날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그레이트 글렌이 지금의 깊고 장엄한 협곡으로 완성되기까지 수억 년의 시간이 필요했듯, 어쩌면 스스로가 그은 선 너머에 새로운 길이 뚜렷이 보이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만 몰래 고백건대 속으로는 가끔 이대로 아무런 문도 열리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막막함이 들 때도 없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우리는 멈춰 설 수만은 없는 존재인가 봅니다. 마치 그레이트 글렌의 험준함 속에서도 기어코 물길을 내어 바다를 연결했던 사람들처럼, 우리 안에도 새로운 길을 만들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본능적인 열망이 꿈틀대기 때문입니다. 그 열망을 가라앉힌 채 그저 숨 죽인 채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길은 단번에 나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오랜 시간 웅크리고, 더듬고, 파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마치 빙하가 조금씩 계곡을 넓혀가듯, 작은 도전과 시도들이 쌓이고 모여 비로소 나만의 협곡을, 나만의 운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 끝이 어디일지,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경계를 넘어 나아가려는 지금 이 순간의 발걸음 그 자체일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도 각자의 단층선이 있다면,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가고 있는 중이라면, 우리가 제각기 만들어갈 새로운 운하가 건너편의 바다로 이어지기를, 믿고 응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