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가장 큰 희망, '시간'
이준석 전 대표 기자회견 비평
보수의 가장 큰 희망은 시간이다
오늘(13일) 2시, 이준석 대표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습니다. 약 1시간 가량 진행된 기자회견을 두고, 정치 9단이라고 불리는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결국 이 전 대표가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평했습니다. 이후 진행된 질의응답에서도 여러 무게감 있는 문답들이 오고 갔는데, 정점은 이 대표가 본인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 것이었습니다.
"당원 가입하기 좋은 토요일 저녁입니다. 그들이 유튜브에 돈을 쏠 때, 우린 당원이 되어 미래를 준비합시다"
확신했습니다. 이제 보수의 가장 큰 희망은 시간입니다.
현재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조사기관별로 그 결과가 다양하지만, 갤럽 리포트 기준 약 25%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준석 대표를 해임하는 과정에서 노출된 당정의 유착관계, 코로나의 재유행, 낸시 펠로시 패싱, 호우로 인한 피해 등의 악재를 고려하면 오히려 선방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식시장에서는 '저점'의 밑에도 지옥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주식이 아니라 한국의 현실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 더 이상의 악재가 추가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상황을 '저점'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25%는, 러프하게 말하자면, 바닥에서조차 윤석열을 긍정하는 콘크리트 지지층입니다. 해당 지지층의 특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조영할 수 있습니다. 첫째, 60·70세대의 지지세(37%·44%)가 두드러진다는 것이고, 둘째, 충청을 제외하면 대구·경북(38%)과 부산·울산·경남(32%)의 지지세가 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소위 국민의 힘의 '전통적 지지층'입니다. 즉,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수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는 집단입니다. 여기서 한국정치의 과거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준석 대표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이전, 한국정치를 지배하는 갈등균열은 지역과 세대였습니다. 지역갈등은 영남과 호남의 대립, 세대갈등은 고령층 유권자(6070)와 상대적 저연령층 유권자(4050)의 대립을 그 골자로 했습니다. 1990년 3당합당 이후로 한국정치를 지배해 온 지역갈등은 이번 대선에까지 존재감을 드러낼만큼 공고했고, 전쟁과 민주화운동으로 표상되는 세대갈등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따라 정치권의 선거전략은 별다른 혁신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보수정당은 6070과 영남의 유권자를 기반으로, 진보정당은 4050과 호남의 유권자를 기반으로. 매 선거때마다 사소한 디테일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구도 자체는 변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준석 대표의 효용이 드러납니다. 이준석 대표의 세대포위론과 서진정책이 판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간의 한국정치는 고이고 썩어가던 연못과 같았습니다. 선거마다 되풀이되는 지역·세대갈등과, 공천권을 기반으로 한 기득권 체제는 구 체제(앙시엥 레짐)를 굳건히 지탱하는 두 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권자들, 특히 청년층은 정치에 대해 혐오를 가장 먼저 학습했습니다. 그림이 예쁘지 않은데 돈과 시간을 지불하고 전시회를 갈 이유가 없습니다. 새로운 물이 유입되지 않는 오수 속에서, 그들만의 잔치는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정치인들은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고 때로는 조장했습니다. 목적이 있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그 자체가 목적인 분들이니 반가울 수 밖에요. 정치인은 대중이 정치에서 관심을 돌릴 때 가장 편합니다. 그런 사회엔 견제와 감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탁류 속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인물도 있었습니다. 화합과 통합을 이야기하고, 꿈과 희망을 노래하던 이들, 어두운 밤이기에 더욱 빛나던 별과 같은 이들을 기억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중 일부는 적절한 이데올로기를 제시하지 못해 스러지고, 일부는 운과 기회가 없어 스러지고, 더욱 많은 경우는 조직적인 반발에 맞서다 장렬히 산화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정치는 그 속에서 모두 같이 늙어가며 선수만 교체될 뿐, 미래에 대한 가망이 없었습니다. '정치를 혐오하니까 관심없다'고 말하는 게 정답이고 쿨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을 기억합니다. 대중이 눈을 돌린 정치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곳에 정치의 원천인 미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도 반대하는 분들도 공감할 수 있는 명제가 있습니다. 이 대표는 기존의 '여의도 문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자격시험 등을 도입해 기득권의 핵심이던 공천 시스템을 건드렸고, 새로운 어젠다를 발굴해 2030세대를 정치판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서진정책을 통해 호남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보수정당과는 거리가 멀었던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면모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경기의 흐름을 바꾸려면 기존의 흐름을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판세를 뒤집으려면 새로운 차원의 전술이 필요합니다. 탁류에서 열심히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반복되는 선수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대표는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한국정치를 조망하고 구 체제를 전복하려고 했습니다. 여의도의 공고한 성을 두들기며, 가장 취약한 약점들을 헤집어가면서 말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던 해법입니다. 그러나 실행하지 못하던 것들입니다. 정치인은 그의 말이나 능력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행적과 그에 대한 신뢰(크레딧)로 평가 받습니다.
국민의힘의 새로운 지지층은 물론 '이준석'이라는 인물에 매료된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런 분들조차도 결국은 그가 추구한 가치와 정책을 신뢰하고 공감하기 때문에 유입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기자회견에서도 드러났듯이 이 대표의 사상적 기반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삼는 현대적 의미의 보수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지지층이 이 대표와 사상적 기반을 공유한다고 가정할 때, 이들은 전통적인 지지층과는 이질적인 집단입니다. 전통적 지지층의 사상적 기반은 반공주의를 토대로 한 근대적 의미의 보수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국민의힘이라는 한 주택에 두 명의 임차인이 거주하는 꼴입니다. 그리고 그 중 한 임차인은 그 시점이 문제일 뿐 언젠가는 방을 뺄 수 밖에 없습니다.
국민의힘의 전통적 지지층은 지금은 그 위세가 대단하지만 언젠가는 와해될 집단입니다. 그들을 대표하는 것이 6070과 영남이라는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표가 추구한 서진정책과 세대포위론을 통한 2030의 정치세력화는 결국 보수정당이 호남과 청년층에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국민의힘은 보수정당이지만 호남에서 유례가 없던 득표율을 얻은 정당이 되었고, 책임당원 중 약 20%가 2030세대인 정당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지지층의 비중이 늘어날수록 전통적 지지층의 비중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습니다. 지역갈등도 세대갈등도 그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금의 고연령층 유권자들은 시간에 따라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들 중에서도 영호남의 지역갈등보다는 보수의 가치에 공감하는 합리적인 이탈자들이 계속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새로 유입되는 청년층이 세대와 지역에 따라 보수정당을 지지할 개연성은 매우 낮습니다. 유입은 적고 유출은 많으니 전통적 지지층이 와해되는 것은 순리입니다. 다만 문제는 시간이 흐를 때까지 새로운 지지층이 버틸 수 있느냐입니다. 쉽게 말해, 그들이 다수세력이 될 때까지 정당에 대한 일체감, 나아가 정치에 대한 효능감을 유지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대표가 오늘 미래를 얘기한 까닭이 나옵니다. 이 대표는 기자회견과 그 후의 질의응답에서 본인의 분노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마무리하는 글에서는 미래를 대비하자며 당원가입을 독려했습니다. 미래를 대비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희망과 연결됩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 없이는 오늘을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미래를 준비할 이유도 없습니다. 반대로 해석하면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대표는 지금의 국민의힘이, 나아가 한국정치가 나아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표가 오늘 쏘아올린 것은 미사일이 아니라 유권자들에게 대한 호소에 가깝습니다. 권력은 십 년을 못 가고 꽃은 열흘을 가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이길 수 밖에 없는 싸움이라는 걸 이 대표는 확신하고 있고, 그렇기에 유권자들은 이 복마전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버텨달라는 메세지입니다.
이 대표라는 인물을 높게 평가하지만 그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준석'보다는 '이준석이 추구한 가치와 신념'을 봐야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시대는 변하고 전통적인 보수의 지지층은 저물 수밖에 없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 정합하는 보수주의, 합리적이고 따뜻한 보수주의를 신봉하는 세력은 결국 다수가 될 것입니다. 그들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기다리는 동안 변질되지만 않는다면, 고이고 썩어가던 한국정치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낼 세력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지지하는 정당을 떠나 모두가 환영할 일입니다. 그간 제 역할을 못하던 보수정당이 제 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관측된 것이니까요.
학부 시절의 일입니다. 존경하는 모 정치학과 교수님께서 강의 도중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보수의 가장 큰 적은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며 보수정당의 지지층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단 한번도 그분의 통찰력을 의심한 적이 없고, 당시 시대상을 꿰뚫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습니다. 이제는 그 말씀의 역이 성립합니다.
지금 보수의 가장 큰 희망은 '시간'입니다. 시간이 흐르며 전통적인 보수정당의 지지층은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