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9일, 당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자동으로 해임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의 부적절한 문자메시지가 노출되는 사건들도 벌어졌습니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여러 촌극에 대한 단상들을 뒤로 하고, 저는 근본적인 물음 하나에 천착하게 되었습니다. 국민의힘은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입니다. 그렇다면 해당 정당은 보수의 가치를 추구해야 마땅합니다. 과연 국민의 힘은 지금 보수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보수의 가치,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보수의 가치란 무엇인가
러셀 커크가 그의 저작, <<보수의 정신>>에서 정의한 보수주의의 특성중 두 부분을 추려봤습니다.
· 다양성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다.
· 법률과 규범을 믿는다.
첫번째 보수의 가치는 다양성에 대한 존중입니다. 대선 승리 이후 잠깐의 밀월기를 거쳐, '윤핵관'과 친윤계는 이준석 대표와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정당 내부에 갈등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현대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포함하고, 그래서 의회에 최대한 많은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므로 의회를 구성하는 정당의 내부에 다양한 세력과 계파가 존재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국민의힘의 갈등 양상은 '친윤계의 이준석 축출'이라는 구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계파간의 투쟁이라기 보다는 특정 계파의 소수세력에 대한 축출 구도를 띠고 있다는 겁니다.
더욱 큰 문제가 되는 사실도 있습니다. 비대위가 출범하며 친윤계가 당권을 장악함에 따라, 국민의힘 내부에 유의미한 계파는 친윤계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특정 세력이 독주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국민의힘 내부에는 더 이상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고, 그러므로 견제와 균형이 상실되었습니다. 이준석 대표의 축출은 그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진보정당이 보다 열려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 제대로 된 보수정당이라면 그 이상으로 소수세력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존중해야 합니다. 이준석 대표가 선거기간부터 시작해 친윤계와 갈등을 빚었던 것도, 반대되는 메시지를 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반대세력일수록 따뜻하게 품어내고 공통된 목적을 위해 달리는 것이 보수주의의 매력일 겁니다. '내부총질이나 하는 당대표'라는 인식이 팽배한 것을 보아하니, 당분간 국민의힘에 그런 세련된 보수의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두번째 보수의 가치는 기존 법체제와 규범에 대한 존중입니다. 이 부분은 보수의 근원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보수주의란 결국 프랑스 대혁명의 급진성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한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태생적으로 혁명보다는 기존 법체제를 존중하며 추구하는 점진적인 개혁과 친밀합니다. 국가의 최상위법은 헌법이고, 정당의 경우 당헌입니다. 그러므로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당 내부의 활동은 당헌과 당규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국민의힘이 비대위 체제를 출범한 절차를 보면, 과연 이 정당이 당헌과 당규를 존중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국민의힘의 비대위원회 소집절차를 시간순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8월 2일,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서 '비대위 소집을 위한 전국위원회 소집'이 의결되었습니다. 당시 권성동 원내대표와 성일종 정책위의장, 배현진 최고위원과 윤영석 최고위원이 참여해 의결하였는데, 이미 사의를 표명했던 최고위원들이 의결에 참여해 논란이 되었습니다. 배현진 의원은 7월 29일, 윤영석 의원은 7월 31일에 이미 사의를 밝힌 바가 있습니다. 배 의원은 사퇴서를 제출했지만 수리가 안됬다며, 그리고 윤영석 의원은 해당 의결 이후에 사퇴서를 냈다며 해명했습니다. 이후 최고위는 상임전국위원회에 "비대위로 전환할 수 있는 당의 비상상황에 해당한다고 해석한다"는 내용의 유권해석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8월 5일, 상임전국위원회에서 이준석 대표가 ‘당원권 6개월 징계’를 받고, 최고위원 과반이 사퇴의사를 표명한 상황을 ‘비상상황’이라고 유권해석했습니다.
8월 9일, 전국위원회에서 당대표 '직무대행'이 비상대책위원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하는 당헌 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기존 당헌에 따르면 당 대표 또는 당 대표 '권한대행'만이 비대위원장을 임명할 수 있었으나, 권성동 원내대표가 겸하고 있는 당대표 '직무대행'도 비대위원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당헌을 수정한 것입니다. 이후 같은 날 전국위원회 의결로 주호영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출범했습니다.
사퇴를 선언한 최고위원들이 의결에 참여하는 것도 충분히 비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퇴의사를 표명한 최고위원들의 의결을 통해 요청된 유권해석이, '비상상황'의 근거로 최고위원의 과반이 사퇴의사를 표명했다는 사실을 거론한다면 자기모순입니다. 상임전국위의 해석에 따르면 '비상상황을 초래'한 최고위원들이 정작 의결절차에는 정상적으로 참여한 것이네요. 애초에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니 어색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적법한 절차를 지켜서, 순리대로 해야할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니 오류가 생길 수 밖에요. 보수의 대원칙 중 하나인 기존 법체제에 대한 존중은 실종된 채로, 그저 위에서 설정한 목적지를 향해 무작정 달리는 열차를 보는 것 같습니다. 목적지는 잘못 되었고, 심지어 열차는 궤도에서 탈선했으니 어디에 도착할지 의문입니다.
정치는 윤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법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모두 존중하지 않는다면 정치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준석 대표에 대한 윤리위의 징계도 이런저런 비판을 받는 상황 속에서, 이번 비상대책위원회체제 소집절차는 국민의힘이 과연 보수주의 정당인가를 의문케 합니다. 그 곳에는 소수세력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도, 법률과 규범에 대한 존중도 없습니다. 보수주의의 핵심 가치를 외면하는 정당을 보수정당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겁니다. 앞서 언급한 러셀 커크의 저작, <<보수의 정신>>의 머릿말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어느 사회나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개선하려는 추진력과 보존하려는 추진력이 모두 필요하다. 시대의 환경에 따라 우리는 진보 쪽에 힘을 보탤지 아니면 계속성에 무게를 두어야 할지를 결정한다. 현대 사회는 눈이 핑핑 도는 속도로 변화한다. 그에 따른 도덕적 질서와 시민적 질서의 해체를 막는데 지금의 보수적 추진력은 충분할까. 그 사실 여부는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이 얼마나 그들의 유산을 잘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