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와 장례의 목적
죽음에 관해서 - 이태원 사건 비평
사람은 누구나 스러집니다. 노화를 인간의 의학으로 극복하지 못했으니 하루를 산다는 것은 곧 하루를 죽어간다는 뜻입니다. 또한 질병과 사고, 재해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니 매일 갱신되는 사망자 통계가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이미 죽은 사람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장례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모여, 이미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예로부터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가장 두려운 대상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 중 하나입니다. 미지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 사후세계는 존재하는지, 과연 죽음이란 현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죽음은 현재 수준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이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상 죽음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무수히 많았습니다. 불로장생을 꿈꾸며 온갖 약과 독을 먹기도 했고, 종교에 의지해 사후세계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확실해지는 건 우린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가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사자(死者)가 본인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장례는 결국 산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삶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항상성입니다. 삶은 어떠한 고난에도 꺾이지 않고 지속되기에 그 자체로 고귀합니다. 당연히, 이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극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대표적인 수단이 추모와 장례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모여 죽은 이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 상실로 인한 공허함과 슬픔을 멜랑콜리와 애도로 승화합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죽은 사람을 추모하며 일상으로 복귀하고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또한 사회는 추모를 통해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고취하고 더욱 단단하게 결속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타인은 감각의 영역 저편에 있기에 그들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추모하는 사람들과 국가를 언짢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추모의 목적은 함께 슬픔을 치유하고 공동체가 일상을 회복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우리, 산 사람을 위한 것이고, 삶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죽은 자의 명예를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고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