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고래
증오에 대한 소고 -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비평
증오가 가득한 사회는 탁류와도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사한 맥락에서, 저는 사회에 만연한 증오가 '빚'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연상은 증오의 연속성에 기반한 것입니다. 과거를 경험한 기성세대는 당신들의 악의를 신세대에게 물려주고, 신세대는 그 악을 싹틔워 다시 미래 세대의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모습. 보신적 없습니까? 탁한 물은 더러워지기만 하고, 대출은 이자가 붙어 불어나기만 합니다. 퍽 닮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증오는 그 자체로 생물이고, 대를 이어 물려지는 악(惡)입니다. 단절과 폭력을 수단으로 삼아 번성하고, 끝내는 전과확대에 돌입하는 인류의 적(敵)입니다. 단언컨대, 증오는 역사가 기록된 이래로 가장 큰 피해를 기여한 적성 세력입니다. 피해 규모마저 짐작할 수 없는데, 그 과정이 손쉬웠다는 점 역시 충격적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가능했던 까닭은 분명합니다. 증오는 이해와 사유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증오는 이해의 끝이자 분쟁의 시작입니다. 누군가를 악마화하려면 이해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해의 첫걸음은 공감이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타인의 사고와 행동을 온전히 수용하고,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것입니다. 멕시코의 인디오 출신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는 말했습니다. "타인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평화를 의미한다." 이해, 공감, 존중... 이들은 평화의 수 많은 이름입니다. 존중하고 공감하며 이해하는 남을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증오는 이해를 포기하고 타인을 배제하고 단절하는 과정입니다. 남만큼 해치기 쉬운 존재가 어딨겠습니까.
한번 마음먹은 뒤는 더욱 편합니다. 증오를 갖게 된 사람은 사유를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증오는 그 자체로 자극적인 감정이고, 사람을 미워하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유 없는 미움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마약과 같습니다. 의지할수록 생각은 줄어들고, 의존성은 강해진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벗어나기 위해선 수십 배, 수백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도 닮았네요. 이미 증오를 물려받은 사람이 그 영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증오의 근원을 성찰하고 그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사유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손 쉽게 뻗어 증오라는 마약을 움켜쥘 수 있는데, 그 영향에서 벗어나고 타인을 용서하기 위한 노력을 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이해와 사유를 포기하고 증오에 위탁하는 것이 이상한 선택은 아닐겁니다. 타인에 대한 몰이해와 부사유라니, 정말 완벽한 증오의 레시피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탁류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시간을 달려서 과거로부터 전해진 증오의 쇠사슬을 벗어나지 못하고, 빚과 같이 불어나는 악(惡)에 허우적대는 그런 물고기 말입니다. 게다가 인간은 사회라는 물결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인데, 사회의 흐름은 장강처럼 끝없고 도도합니다. 결국 나 혼자 아무리 헤엄쳐도 본래 위치를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이게 한계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개인이 노력해봤자 이 증오의 탁류, 증오의 부채를 벗어날 수 있는가. 소수의 개인이 벗어나도 결국 물결은 바뀌지 않는데. 우리는 하늘을 나는 고래가 될 순 없는가. 증오의 연쇄를 벗어나, 저 드넓은 하늘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고래......
시크교에는 사랑, 평화, 존중과 용기와 같은 미덕들을 우리 내면에 있는 신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증오는 곧 우리 내면에 있는 신의 이름을 포기하는 길이겠습니다. 신앙은 없습니다만, 우리가 때로 증오의 골짜기에 몸을 맡기고 이성을 잃을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기를, 그래서 우리가 하늘을 나는 고래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앙이 없는데 왜 신을 찾냐구요? 악의(惡意)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증오의 채무를 변제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악의를 담고, 남을 용서하고, 사랑을 외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좋아하는 소설에선 이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공감합니다. 그렇기에 신의 존재를 바랍니다. 작금의 세태를 보아하니 우리를 온전히 사랑해주는 신이 있지 않고서야 수습이 안 될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