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스포츠, 종교의 상관관계로 분석하는 작금의 한국정치의 비극
정치는 무엇인가. 데이비드 이스턴은 답한다. 정치란 '사회적 가치의 권위에 의한 배분'이다. 이스턴의 답변은 현대정치학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정치의 정의이다. '정치'라는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소위 '학계의 정설'이 이렇다니. 왠지 정치라는 것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일 것만 같다. 아니다. 정치는 그 무엇보다 감정적이고 불합리하다. 정치는 윤리나 철학이 아니다. 고상하지 않고, 실상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정치는 스포츠나 종교와 어울리는 개념이다.
정치는 스포츠와 같다. 통설이다.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과 스포츠팀을 응원하는 것은 그 심리적 기제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팬은 특정 선수를 좋아하고, 그 선수가 속한 팀이 리그에서 우승하기를 바란다. 유권자는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고, 그 정치인이 속한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 사소한 디테일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맥락은 같다. 스포츠팀을 냉철한 사유의 끝에 논리와 근거로서 지지하는가? 그 사람은 팬이 아니다. 그것은 스포츠가 아니다. 팀은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구 반대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지지하지 않는다. 응원한다. 가보지도 못한 이역만리의 그깟 공놀이 팀을 사랑한다. 왜? 이유를 댈 수 없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좋아하는 온갖 근거를 열거하는 순간, 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좋아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스포츠가 아니게 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심장으로 응원하는 것이다. 나의 두번째 심장은 맨체스터에 있다. 그래서 스포츠는 감성의 친구이다. 그런데 정치는 다른가?
어느 정치인을 지지하는가, 혹은 어느 정당을 지지하는가를 물었을 때, 사람들은 누군가가 유행시킨 지루한 래퍼토리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곤 한다. 공약이 좋아서, 철학이 마음에 들어서, 정치를 잘해서...답답해도 서로의 골통을 쪼갤 도끼가 없기에, 현대인은 솔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진정 차가운 이성으로서, 냉철한 사유의 결과로 정치인을 좋아하는가? 특정 정치인의 정책이나 선거공약, 업적을 구체적으로 읊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본인이 지지하는 정치인에 대한 비판에는 마치 자기가 찔린 것처럼 반응하지 않는가. 정신적인 기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은 감정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거나, 십자가에 못박힌 자처럼, 내적 한계를 초월한 일부만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소위 '공약을 보고 뽑아야 한다'는 식의 타자로부터 주입된 가치관, '나는 합리적인 유권자'라는 자부심, 지적허영과 가식을 내려놓고 나면 본질이 남는다. 어떠한 팬시한 이유를 붙여도, 우리는 결국은 특정인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에 이끌려 지지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유권자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때, 지금, 여기, 한국의 추잡하고 오수같은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정치는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에 있다. 인정하자. 대다수의 유권자는 그냥 그 정치인이 '왠지 좋아서' 뽑는다. 정치에서만큼은 달걀이 닭에 선행한다. 결과가 과정을 낳는다. 그냥 그 후보자가 좋으니 뽑고, 그 이후에 자신의 선택을 포장할 온갖 이유를 지어내 '합리적인 유권자인 자신'을 소비한다. 의외로, 상당한 수의 독재자가 선거를 통해 그 정당성을 확보했다. 일단 특정 후보자를 좋아하고 난 뒤라면, 그 능력이나 공약, 가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연애와 결혼을 떠올리면 쉽다. 우리는 연인의 무수한 단점들을 인지하면서도, 일단 사랑에 빠진 뒤라면 불빛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달려들지 않는가. 후보자가 종말의 가능성이더라도, 일단 뽑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가져올 비참한 결실은 무시하면서.
같은 맥락에서, 정치와 종교는 그 뿌리가 같다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절대자를 숭배하는 신앙이다. 나는 신을 믿는다. 하느님을 믿는다. 알라를 믿는다. 부처를 믿는다. 고로 신앙이란 믿음이다. 종교인은 절대자를 믿고 의지한다. 그런데 '신'은 자연발생하는가? 아니다. 신 이전에 '창시자'가 있었다. 완벽한 신이 '빛이 있으라'를 외치기 전에, 불완전한 인간이 '신이 있으라'고 외치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모든 종교에는 창시자가 있다. 창시자는 신을 정의하고, 신의 뜻을 경전에 적고 계율을 만들었다. 시대가 흐른다. 종교가 발전한다. 현실은 과거의 성기고 단순한 교리와 정합하지 않고, 율법은 너무 방대해져 혼란스럽기만 하다. 신은 하나인데, 신의 뜻을 전한다는 선지자들이 난립하며 각자 다른 가르침을 전한다. 신은 하나인데, 교회가 분열한다. 정리가 필요하다. 이 복마전을 바로잡을 체계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과 신도들의 사이에 종교적 지도자를 세운다. 경전을 해석할 배타적 권한을 부여한다. 특정 견해나 해석론을 채택한 뒤, 사제 등의 종교적 지도자를 통해 전파한다. 다른 방식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세력들은 이단으로 선포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멋대로 신을 재단하려는 불경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매커니즘을 러프하게 요약하면 이런 식이다. 창시자, 신, 경전, 종교적 지도자로 이어지는 연쇄 속에서 종교적 공동체는 보수화된다. 이미 '정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와 배치되는 견해나 반대세력은 공격받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종교인의 사고방식은 이성과 합리와는 거리가 있다. 내가 왜 종교를 믿어야 하는지 철저히 고민하고, 어느 절대자의 가르침이 옳은지를 비교·분석하며, 종교적 지도자의 경전해석이 타당한가를 분석하며 신의 품에 귀의하는가. 그럴리가. 상당수의 한국 종교인들은 '신앙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며, '전도'라는 명목으로 싫다는 사람을 붙잡고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가. 이성을 배제한 맹목적인 굴종의 끝에 남은건 아집과 독선 뿐이다. 맹신에 빠진 종교인의 사고는 이런 식이다.
신은 완전하고 무결하다. 신의 뜻을 거역할 순 없다. 의심해서도 안 된다. 내 지도자는 신의 말씀을 전한다. 신의 말씀은 옳다. 내 지도자가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이에 배치되는 견해들을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다, 마귀다. 악마다. 사탄이다. 사탄의 권세는 하나님의 교회를 침범하지 못한다. 저들은 죽어야 한다. 사회에서 배제해야만 한다. 이것은 영적 전쟁이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는 거룩한 사명에 함께하고 있다. 내 말에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이단이다. 모두 찔러 죽여야 할 악마의 사생아들이다. 나는 기꺼이 주의 뜻에 따라 저 이단을 쳐죽이겠다.
위 사고의 연쇄가 꽤 친숙하지 않는가? 계엄 이후의 한국정치에 대입해보겠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다.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까지 결단한 건 선관위에 숨어든 99명의 알리바바와 민주당의 의회독재 때문이다. 대통령의 말인데 믿는게 당연하다. 그러므로 윤석열 대통령에 반대하는 저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는 것만이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할 유일한 방법이다. 처단해야만 한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의 의료개혁에 반대하는 저 전공의 놈들도 같이 처단해야 한다. 이건 국민 저항권이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탄핵을 찬성하는 놈들은 모두 종북좌파빨갱이 새끼들이다. 모두 '수거'해서 '처단'해야할 쓰레기다. 나는 기꺼이 이 한몸을 바쳐서 저 중공간첩새끼들을 쳐죽이겠다.
익숙한게 당연하다. 탄핵 반대 집회의 가장 큰 주체는 여러 기독교 계열의 연합이니까. 이제 한국의 유권자 중 상당수는 '윤석열'이라는 개인을 좋아하는 감정의 단계를 넘어서, 윤석열을 믿는 신앙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의 말이 옳고, 뜻이 지당하고, 계엄에 저항하는 놈들은 다 민주당과 중공종북좌파간첩쁘락치들이고...이미 '믿고 싶어서 믿는' 사람들에게는 반대증거가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당신의 신이 거짓이라는 증거를 아무리 들이밀어도, 신앙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이비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교주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복종하는 신도들에게 '당신이 믿는 그 교주는 인간이고, 여신도들은 성폭행하고 남신도들은 재산을 갈취하는 범죄자'라는 증거를 들이밀어도 듣겠는가. 비슷한 논지다. 정치와 종교는 뿌리가 같은 두 열매다. '믿음'이 본질이다. 한 번 정치인을 믿고 나면, 그 정치인이 악을 흩뿌리고 다니는 종말의 기수여도 믿는 것이다. 그들에게 윤석열의 계엄은 헌법과 법률에 위반한다고 아무리 논박해도 먹히지 않는다. 이미 윤석열에 대한 공격은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방어적이고 공격적으로 반응하기 쉽다. 실제로 정치심리학에서는 '유권자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차단하고, 합치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명제를 입증한 바 있다. 이제 해당 명제를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예시 중의 하나로 2024년 12월 3일 이후의 한국이 추가될 것이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한국의 정치를 보면 여기가 중세의 유럽인 것 같기도 하고, 윤석열이라는 사람의 아들을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동치하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윤석열은 살아있는 대한민국이자, 자유민주주의의 화신이 아니겠는가.
정치는 스포츠와 같다. 감정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특정 후보가 '그냥 좋아서' 투표한다. 정치는 종교와 같다.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지지하는 후보가 하는 말은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합리적인 유권자'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나서야 이 비참한 지옥도를 이해할 수 있다. 2025년의 한국 사회가 곧 게헨나다. 독재자가 될 뻔한 대통령과,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과, 그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뒤엉키는 지옥의 밑바닥이다. 독재자가 될 뻔한 대통령이 돌아온다면, 면죄부를 얻은 그가 다시 버튼을 누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는가. 이때 탄핵에 찬성하는 세력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수용할 수 있을까. 반대로 대통령이 탄핵된다면,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과연 헌법재판소의 담장을 부수지 않을 것인가. 서부지법에 이어 헌법재판소까지 함락당하지 않을 수 있는가. 감정과 종교가 지배하는 정치가, 이성과 합리라는 최소한의 가식과 포장조차 벗어던질 때,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지옥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광경을 보고 있다.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관찰자, 방관자가 아니라 삶의 실천적 주체인 나로 남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남은 선택은 하나 뿐이다. 한 줌 양심을 그러잡고,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의 이름을 흐느껴 부르는 수밖에.
나는 선고일의 그 곳에 있을 것이다. 묵묵히 민주주의의 이름을 흐느껴 부르겠다. 이 공동체의 시민인 이상 인용이든, 기각이든, 각하든,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결정이 나오더라도 수용해야 한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법원을 때려 부수는 건 폭도에 불과하다. 법치주의가 그 한계를 시험받더라도,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 가능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민주주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다. '저항권'이라는 건 일각에서 논하는 것처럼 쉽게 입에 담을 개념이 아니다. 복수와 사적 제재의 폐단으로 국가가 나서서 법체계를 통한 분쟁의 해결을 선언한지 수백년이 지났다. 이 법치주의라는 시스템은 거인이다. 정의의 실현을 위한 인류의 피와 노력이 담긴 총체다. 그 위에 앉아 더 넓은 시야를 누리며 보호받다가, 개인에게 불만족스러운 결론이 나온다고 하여 시스템을 부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반공동체주의자다. 일단 헌법재판소의 결론은 존중되어야 한다.
저항권은 그 다음 단계에나 논의되어야 할 개념이다. 만일 불행한 사건의 연속으로, 헌법재판소는 독재자가 될 뻔한 대통령을 복귀시키고, 그 대통령이 드디어 다시 독재자가 되고자 할 때, 그래서 기관에 불과한 그에게 주권자의 이익을 위하여 더욱 효율적으로 봉사하라고 보장해준 온갖 법률적 수단을 동원하여, 오히려 주권자에게 총과 칼을 들이댈 때에야 행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토마스 제퍼슨은 말했다.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1987년 이후 근 40년 간 굶주린 민주주의가 시민의 피를 요구한다면, 그때서야 기꺼이 내어줄 수 밖에. 비참한 절망 속에서, 우리에게 남은 이성의 빛과 생각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나의 삶이 국가에 의해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위하여, 내가 원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하여, 내 생각과 행동을 일절 방해받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하여, 나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부당한 공권력의 침해와 폭력에 시달리지 않을 자유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덧붙임: 내가 글을 올린다는 것은 개인의 비극이자 곧 공동체의 비극이다. 감정과 사고(思考)를 배설하지 아니하고는 나의 인격적인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매우 절박하고 구체적인 상황에서만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내가 현업에 종사하기 전까지 유효한 것으로, 나는 아직 서정적인 고민만으로도 괴롭기에 수립한 것이다. 2023년 12월 7일 마지막 글을 올린 뒤, 나는 1년이 넘도록 이 원칙을 꽤나 잘 지켜왔다. 거듭하는 부조리와 불합리에 눈을 감고, 나의 삶에 집중하며 시간을 소비했다. 그리하여, 내가 왔으니, 이는 곧 이 공동체의 모순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곪아 터져나오고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부정의의 폭발이 지겹다. 악(惡)은 개화하고 번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