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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제주 May 26. 2020

다시 한라산

 백록담을 만나다

 글을 읽기에 앞서 한가지 말씀을 드리면 오늘의 글이 산으로 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수능 언어영역 문제에서 "다음 중 글의 주제와 어울리지 않는 문장은"이라는 문제가 나왔을 때 정답이 될만한 문장들이 곳곳에 숨어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백록담 방문기


사람마다 모두 다른 대답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 제주 여행의 백미를 꼽으라면(나도 역시 여러 가지가 떠오르겠지만) 역시 한라산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이렇게 제주에 빠지게 만든 것도 실상 한라산이지 않은가. 사실 한겨울의 칼바람을 무릅쓰고 제주도를 찾은 목적도 온전히 눈 덮인 한라산 설경을 감상하며 백록담에 등반하는 것이었다. 문경수 님의 책 덕분에 화산섬 제주에 대해 새롭게 눈 뜨면서 많은 일정이 추가되긴 했지만 원래는 이 추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눈 덮인 한라산을 다시 보고 싶었다. 백록담을 중심으로 한 한라산 정상부는 보통 겨울에는 백발이 성성하지만, 인간의 모습과는 다르게  봄이 와서 결국에는 젊음을 되찾기전에

 

 하지만 겨우내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설산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지 못하다가, 입춘이 지나서야 겨우 시간을 내어 제주를 찾게 된다. 제주에 들어가기 며칠 전부터 제주도 날씨와 한라산 정상부 CCTV(백록담,왕관오름 등 한라산 주요부는 CCTV로 실시간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평년의 날씨를 보면 2월까지는 눈 덮인 한라산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세한(歲寒)의 추위가 몰려와야 하는데, 입춘을 맞아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제주에 내리면서 눈이 녹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추우면 한라산 정상부는 눈이 내릴 만큼 강수량은 많았으나, 애석하게도 그 높은 한라산 정상에도 봄비가 내린다. 그 봄비가 내린 뒤에 제주도에 가기 전까지 정상부에는 눈이 간간히 내렸지만 한라산을 하얗게 덮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 인생도 마음대로 안되는데 대자연의 섭리를 어찌 거스를 수 있을까. 그러나 다행히도 등반 바로 전날 눈이 제법 내려서 눈에 파묻힌 정도는 아니지만 백발이 듬성듬성 난 반백의 한라산을 맞이하게 된다.


 이번 한라산은 많은 고민 끝에 백록담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관음사 코스로 올라가 성판악 코스로 내려오는 방법을 선택한다. 관음사코스가 등반의 난이도가 높지만 왕관릉 등 화산 폭발이 만들어낸 기암괴석 절경을 한라산을 올라가면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경치가 좋다고 하여 선택을 하게 되었다. (물론 가파른 경사를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올려다보는 일이 쉽지는 않다. 잘못하면 군대에서 행군하듯이 발끝만 보고 올라가게 될 수 있다)

겨울 한라산 등반은 아이젠 등 안전장비가 필수다
안내문 뒤편으로 장비를 착용하는 사람들과 야영장의 텐트가 보인다

 한라산 기슭에는 한라산 등반을 위한 장비를(아이젠, 등산스틱, 등산화 등 겨울 등반을 위한 모든 장비가 있어 초심자들에게도 굉장히 유용하다) 렌털 해주는 게스트하우스들이 있다. 각종 장비 렌털은 물론이고, 새벽부터 아침식사를 제공해준 뒤, 관음사, 성판악, 영실 등반코스 등의 등반코스 입구에 숙박객들을 데려다주는 게스트하우스가 몇 군데 있어서  제주대학교 근처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숙박을 하고 새벽에 관음사를 향해 출발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 30여 명의 숙박객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관음사코스를 선택했다고 했다. 또 나중에 하산하다 보니 성판악 쪽이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쉬워서 그런지 관음사코스에 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오르는 듯했다. 성판악으로 올라왔으면 정말 심심한 전망을 보면서 올라왔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이건 관음사 코스를 통해 백록담을 보고 내려가는 길이니까 드는 생각이지 올라오는 등반객들의 표정은 매우 힘들어 보였고, 세상의 모든 등산객들과 마찬가지로 "정상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를 물어보았다. 

탐라계곡에서 탐라계곡 대피소를 오르는 계단, 등산객을 곡소리 나게 하는 난코스의 시작이다

 관음사를 오르는 길은 성판악에 비해서는 많이 가파른 편이다. 한라산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등반코스별로 난이도가 표시되어 있는데 관음사 코스는 많은 부분이 난이도가 어려운 것으로 표시되어있다. 그래서 난이도가 어려운 것을 고려해서 쉬엄쉬엄 천천히 올라갔더니 안내에 나온 것처럼 정확히 5시간 30분이 걸렸다. 개인적으로 아주 힘든 편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운동 여부에 따라 힘들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오르다 보면 누군가는 굉장히 씩씩하고 빠르게 올라가는 반면, 누군가는 정말 저 사람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힘겹게 올라가는 사람도 있어서 체감 난이도가 천차만별인 듯 싶었다. 내가 올라간 5시간 30분이라는 시간도 힘을 안배하고 경치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천천히 올라간 시간이라, 젊은 남성들끼리 온 경우에는 훨씬 빨리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삼각봉 대피소까지 3시간 정도 걸린 것 같은데, 빨리 올라오는 팀 얘기를 들어보면 2시간 조금 넘게 걸려서 올라온 것 같았고, 나는 삼각봉에서 20분 넘게 충분한 휴식을 취했는데, 그분들은 한 10분 정도 쉬더니 빠르게 올라갔다. 물론 빠르게 올라가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경치를 충분히 감상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초반에 체력을 많이 소진하면 나중에 정상에 도착하기도  전에 완전히 지쳐버리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속된 말로 퍼질 수가 있다) 그러니 등산은 본인의 체력에 맞게 속도를 조절하며  올라가야 한다.

 

 또 한라산 같이 높은 산은 올라가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성판악으로 내려오면 족히 4시간을 걸어 내려와야 하는데 아무리 하산이 등산보다 에너지 소모가 적다한들, 평지에서 4시간을 걷는 것도 보통일이 아닌데 산에서야 오죽하랴. 올라가는 시간 내려오는 시간 합치면 8시간 이상 걸어야 하는 중노동이다. 또 내려올  때 긴장이 풀려서 내려오다가 지쳐버리는 경우도 있고, 제일 무서운 건 힘이 빠져서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다가 발목이나 무릎을 다치는 경우다. 산에서 내려올 때는 발목에 힘을 강하게 주고,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게 충격을 분산하면서 내려와야 한다.

 한라산의 묘미이자 장점이자 단점은 1,500미터는 넘어가야 해안 쪽을 내려다보는 풍광이 기가 막히다는 점이다. 등반 초반에는 활엽수 수림과 조금 더 올라와서는 침엽수림에 막혀 산 아래쪽이 잘 보이지 않지만 고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키가 작은 관목, 고산식물 식생이 발달하면서 산 아래쪽이 시원하게 보이기 시작한다(식생 측면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면에 가까운 산 아래 지역보다는 산 정상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경관이 좋아지는 건 일반적으로 당연한 이치다).

삼각봉 대피소에 도달하기 전에는 나무에 가려 아직은 해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삼각봉 대피소(1,500 m)에 올라야 저 멀리 해안이 보인다


삼각봉 대피소의 경고문구. 도대체 누가 해발 1,500m의 한라산 중턱에서 썰매를 탄단 말인가.

 그래서 등반 초반에는 여기가 제주도에 있는 한라산인지 지리산을 오르는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시야가 탁 터지는 산 중턱 이상에 올라가서 해안을 내려다봐야 저 멀리에 바다가 보이고 수평 선위로 바다와는 다른 색을 가진 하늘이 보이면 아 이곳이 바로 망망대해 한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제주도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육지의 산에서는 산 위에서 첩첩산중의 다른 산들이 보이는 절경이라면 한라산은 바다가 시원하게 보인다. 게다가 육지의 산에서 보이는 바다와 다르게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보는 것처럼 인간의 눈에 잡히는 모든 화면이 바다와 하늘의 푸른색으로 가득 차 있다.

삼각봉 대피소에 백록담에 오르기까지는 산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속이 시원해지는 경관이 펼쳐진다. 이 장관을 위해 새벽부터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닐까
백록담 문턱에서 바라본 제주시내
눈이 살짝 쌓인 백록담
(좌) 운해를 감상하며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사이로 줄을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우) 믿기 힘들겠지만 백록담 표지석과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다
한라산에서 바라본 제주시내는 비교적 맑은 반면 
서귀포쪽은 운해가 장관이다

사람은 본인의 필터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사람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같은 세상을 매우 다르게 볼 수 있다.

 만약 식물학자가 한라산을 오른다면 관음사 입구에서는 활엽수와 조리대가 발달한 난대림이다가 삼각봉 대피소 부근에서는 침엽수림이 보이다가 다시 키가 작은 관목림이 보이고 정상 부근에서는 일반인들은 구분조차 어려운 고산식물들이 자라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낄 것이다.

 지질학자가 산을 오르면, 관음사 등반코스와 성판악 등반코스에서 화산석의 모습이 다른 것을 보고 흥분할 것이고, 백록담의 화구와 백록담에서 탐라계곡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의 모습을 보고 수십만 년 전 화산 폭발의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이 산에 오르면 무엇을 상상할까. 한라산은 제주에서 난리가 나면 최후의 도피처가 되는 곳이다. 삼별초가 개경에서 출발하여 진도를 거쳐 제주 해안에 도착한 뒤, 여몽연합군에 의해 항파두리성이 무너지자 삼별초의 마지막 지도자인 김통정이 최후의 거점으로 삼은 곳이 한라산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45년 초에는 해안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다가 패전이 가까워지자 최후의 저항 거점으로 삼으려고 했던 곳도 한라산이다.(어승생악에 가면 당시 만들었던 토치카를 볼 수 있다) 또 4·3 사건 당시 정부군이 유화정책에서 강경책으로 돌아서면서 무장대가 숨어든 곳도 한라산이다. 그렇게 한라산으로 몸을 피한 사람들은 높은 산 위에서 제주 해안가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김통정은 불타는 항파두리성을 지켜보았을 테고, 4·3 사건 때 한라산에 숨어든 무장대도 불타는 자신들의 마을을 속절없이 지켜보았을 것이다. 역사학자는 그 때의 감정들을 떠올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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