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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 Jan 29. 2020

검사를 할 걸 그랬나?

아니지요. 그래도 그간 만났던 인연이 너무 소중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소하던 크던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살아갑니다. 거창하게 목표를 설정하여 짜임새 있게 살아가는 삶이 아니더라도, 내일은 공원에 나가 1시간 동안 걷겠다는 마음을 먹거나, 분위기 있는 카페에 가서 2시간 동안 책을 읽겠다는 것도 나름대로의 계획입니다. 허나 한치 앞의 일을 알기 어려운 것이 인생이지요. 진부한 말이지만 진리이기도 합니다. 1시간 동안 걷겠다고 나가다 친구를 만나 술자리에 가게 될 수도 있고(전 이런 걸 좋아합니다), 2시간 동안 책을 읽겠다고 나간 카페가 문을 닫았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카페를 찾아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교통사고로 입원한 병원의 미모의 간호사가 배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데이지를 친 택시기사가 커피를 사러 가지 않았다면, 담배한대만 피우고 운전대를 잡았다면, 데이지가 택시에 치일 일은 없었을 수도 있고, 조국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다면, 민정수석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낭패를 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계획대로 되는 것도 인생이고, 그 반대도 인생입니다. 인생은 어쩌다, 저쩌다 그렇게 저렇게 되기도 합니다.   



   

제가 검찰에 입사한 것도 어쩌다 그렇게 된 경우를 말하고자 이렇게 서두를 꺼낸 것입니다. 제가 검찰에 입사했던 시기엔 공무원은 인기가 없는 직종이었습니다. 급여도 턱없이 적었을 뿐더러 공무원이 대우받는 시기도 아니었습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이 그리 어려운 시기는 아니었다는 것 일 겁니다. 근 30년이 지난 지금은 젊은이들 사이에 공무원이 대세라 하고, 공무원 준비를 하는 이들이 서울 신림동 등지에 몰려있다고 하니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임용되었다는 발령연락을 시골 지서 경찰관으로부터 받은 케이스입니다. 요즘이야 초등학생도 가지고 다니는 휴대폰이지만 그때만 해도 집을 나가 있으면 연락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삐삐도 시티폰도, 애니콜도 없었습니다. 시내 다방으로 전화하거나 우체국 앞 공개 게시판에 ‘황금당구장으로 오라’는 메모지를 붙여놓고 약속을 정하던 시기였으니 많이 불편했지만 낭만도 있던 시기였지요. 그만큼 만남의 변수도 많았습니다.      

검찰직 시험에 응시했던 것도 우연이었습니다. 법대 출신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시도해보는 사법시험 공부를 기웃거리고 있던 차에 마음도 조급하고, 답답하여 취업 수험 서적을 파는 서점에 바람을 쐴 겸 나간 것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수험정보를 인터넷을 이용하지만 그때만 해도 수험정보를 알려면 시내에 있는 서점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 서점에서는 공무원 시험 일정뿐만 아니라 대기업, 공사 그리고 조그마한 중소기업 등의 시험일정까지 파악하여 메모판에 붙여두면서 해당되는 시험과목의 서적을 판매하는 영업 전략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바람을 쐬러 별 생각 없이 시내에 나간 저는, 모든 백수들이 쓸데없이 하듯이 길 옆 복권박스에서 담배와 함께 즉석복권을 하나 구입했습니다. 당연한 ‘꽝’을 허탈하게 확인하고, 털레털레 그 서점을 찾았습니다. 


서점 앞에는 후줄근한 차림새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담배를 줄기차게 피워대며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서점 창문에 붙여놓은 구인란을 보거나 서점 내 게시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누가 봐도 직업이 절실한 취업준비생들이었고,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서점 안으로 들어서는데 아는 얼굴들이 몇이 보였습니다. 같은 입장이니 누가 뭐랄 것은 없지만 얼굴 마주치기가 괜히 민망하고 거북했습니다.


구인란을 보고 있는 사정이 뻔 한 사람들이 서로 안부 인사하기도 뭐했지요. 묻지 않아도 알 안부를 뭐 하러 묻겠습니까. 슬며시 서점을 나와 버렸습니다. 그냥 집에 돌아갈까 하다 사람들이 없는 골목 안에서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습니다. 한 대만 피우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자는 마음이었지요. 하늘을 쳐다보며 연기를 내뱉던 내 눈에, 전봇대에 붙어 있는 공무원 시험 일정표가 들어왔습니다.


서점에서 신문을 오려내어 붙여둔 것으로 각종 수험 서적을 광고하는 전단지와 함께 붙어 있었습니다. 누가 찢어냈는지, 바람에 찢겼는지 모르지만 아랫부분이 찢겨 있었지요. 갑자기 내용이 궁금해졌습니다. 찢어지지 않았다면 거기서 보고 말았을 공무원 시험일정을, 서점에 들어가 나머지 부분을 확인하고 싶은 맘이 들었습니다.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서점 문을 열었습니다. 눈치를 보며 들어선 제 눈에 검찰직 채용시험 일정이 적힌 메모지가 들어왔습니다.


출입문 바로 오른쪽 게시판에 붙어 있던 조그만 메모지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바닥 크기 밖에 되지 않는 신문쪼가리 정도였을 검찰직 채용정보가 왜 눈에 바로 들어왔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게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검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인데 말입니다.(지난 일인데 무슨 허세는 못 부리겠습니까.) 여하튼 이렇게 우연히 검찰수사관 이라는 직업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다음해 경찰관을 통해 검찰청 발령사실을 통보 받았습니다.     



“난 찬성이다”는 부친의 의견이었습니다. 모친은 맘에 들지 않으신지 가타부타 아무말씀 하지 않으셨고, 저는 보장 없는 사법시험에 매달리느니 그냥 공무원으로 생활하자는 쪽으로 최대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뭐든 여지를 두면 편한 쪽으로 생각하고 결정해버리는 것이 인간의 심리 같으니 처음 목표한 무엇이 있다면 다른 여지를 남겨두면 안 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지만 이미 시간은 돌이킬 수 없이 흘렀고,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리라는 보장은 요즘 말로 1도 없으니 쓸데없는 허세성 후회일 뿐입니다만 여하튼 저는 그렇게 만 27세 젊은 나이에 검찰에 입사했습니다.     


부임신고 첫날 검사라는 사람들을 처음 봤습니다. 물론 검찰수사관이라는 사람들도 처음 봤지요. 법대 출신이었지만 검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검찰직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지도 못하고 들어간 검찰청이었습니다. 부임신고를 하는 저에게 차를 한잔 내 주던 지청장은 법대 출신이 왜 사시를 보지 않고, 수사관으로 들어 왔느냐며 부애를 지르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저를 흘깃하곤 웃고 말더군요. 검사를 할 걸 그랬나? 저는 그렇게 검찰수사관이 되었고, 벌써 중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입니다. 하지만 전 맘에 들던 들지 않던 그간 살아온 인생을 돌이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금 돌이키기엔 그간 제가 만났던 인연들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그간 쌓았던 인연을 버리기엔 너무 서글프지요. 지금 오르지 못한 지위보다, 현재 쌓지 못한 부보다, 지금 까지 맺어온 인연이 충분히 값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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