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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 Jan 03. 2020

차별이 불만이면 검사를 하라

타인을 이해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일들 : 

개가 꼬막 먹기, 

곰이 사람 되기, 다섯 살 손주가 당근 먹기,

아프냐? 나도 아프기, 

수사관이 검사되기.                     


대한민국 검찰청의 검사는 매 2년마다, 검찰수사관은 5년마다 의무적으로 다른 검찰청으로 이동을 해야 합니다.  한 직급 승진을 하는 경우 또한 다른 청으로 전보됩니다. 따라서 객지에서 생활해야하는 검사와 수사관을 위해  나라에서는 고맙게도, 일시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숙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검사에게는 아파트를, 수사관들에게는 원룸형태의 독신자 숙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이 되시나요.


저는 수년전 인사이동으로, 기관장의 전입직원에 대한 간담회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검찰청에서는 타 청에서 전입 해온 직원들에게, 전입직원 간담회라는 형식으로 기관장 주관의 점심이나 저녁 식사자리를 마련합니다. 식사를 같이 하며 혹시나 있을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기관장이 들어주겠다는 하해와 같은 성은이 담긴 취지가 있습니다. 그날도 깔끔한 한정식 식당에 오찬 자리가 마련되었고, 기관장을 중심으로 전입직원 10여명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간단한 환영 멘트와 함께, 조용히 진행되던 식사가 얼추 끝나는 시점에, 애로사항 있으면 말해보라는 기관장의 하교가 있었습니다. 


“기탄없이 말하라.”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애로사항이 딱히 해결된 적이 없으므로 고참 수사관들은 대부분 입을 닫지만 가끔 정의감에 불타는 분들이 한분씩 꼭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 순진한, 말하라 했다고 속없이 하는, 소원수리(예전 군대서 써내는 탄원서) 써내라 했다고 눈치 없이 꼭 써낼 것 같은 외모의 모 수사관이 기관장의 ‘기탄없이’를 정말 기탄없이 받아 들였습니다. 얼굴이 상기되어 마른 침을 한번 삼킨 수사관의 긴장된 멘트가 시작됐습니다.

 “수사관들의 관사가 너무 좁고 시설이 열악합니다.” 

내용은 기탄이 없었으나 말은 조심스러웠습니다. 


“관사?” 

애매한 표정의 기관장 반문이 있었고, 수사관은 그렇다고 대답 했습니다. 아뿔싸, 기관장의 반문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관사’의 ‘사’자 억양이 아래로 내려서지 않고, 위로 솟구쳐 있음을 간과한 것입니다. 

“음, 독신자 숙소를 말하는 것이지요?” 

송구하게도 기관장은 스스로 정정을 했습니다. ‘관사’라는 표현은 검사이상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직원들의 임시거처는 ‘숙소’로 표현해야 맞다는 의미인 듯 했습니다. “감히”가 빠져 있는 반문의 의중을 수사관이 눈치 채지 못한 것입니다. 저도 기관장의 의중을 알지 못해 그의 표정을 몰래 살폈지요. 기관장의 표정에 농끼가 보이지 않았으니 ‘감히’가 맞았습니다. 기관장은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부분이 열악하고 불만이라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고하라.”

적절히 마무리 했으면 좋았을 텐데 수사관은 내친김에 그럴 생각이 없었나 봅니다. 

“숙소가 부족하여 좁은 공간에서 수사관이 2명씩 사용해야 하는 불편이 있고, 창문 등이 노후 되어 외풍이 심하며, 검사님들은 혼자 거주하심에도 30평대 아파트에 거주하고, 수사관은 2명이상이 거주함에도 10평 이하의 원룸 같은 숙소에 거주하고 있으니 이를 통촉해 달라.”

수사관은 ‘거주하심에도’와 ‘거주함에도’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었고, 얼굴에 약간의 멋쩍은 웃음과 고하는 사안의 죄스러움을 담아 최대한 공손하게 답하고 있었습니다.  검사와 수사관을 같은 레벨에 놓고 말하기 송구하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말을 조용히 그리고 기탄없지만 소심하게 꺼내 놓은 것입니다. 말없이 듣고 있던 기관장의 답변은 저에게는 꽤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게 불만이면 검사로 들어오시지?”

농담인가? 전 기관장의 얼굴과 눈빛을 재빨리 훑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기관장을 각자의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의아함, 황당함, 미쳤남 등으로. 여전히 기관장의 얼굴과 눈엔 농은 없었습니다. 수사관의 눈치도 코치도 없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말에 심기가 상해서 홧김에 나온 말일 수도 있었지만, 덧 붙여 한 기관장의 대사는 한방 맞아 코 박고 넘어진 놈의 등허리를 팔꿈치로 가격하는 정점을 찍고 있었습니다. 숙소가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거늘, 숙소가 없으면 개인 돈을 지불하고 원룸을 얻어야 할 판국에, 검찰에서는 직원들까지 숙소를 마련해서 주고 있으니 열악한 시설 여부를 떠나서 고마워해야 하지 않느냐는 취지였습니다. 


수사관의 대사는 거기서 끝이 났고, 나머지 식사시간은 기관장 혼자만의 훈시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요지는 이랬습니다. 검사로 들오지 못한 수사관들을 폄하할 의사도, 숙소의 열악함을 고한 수사관을 힐난할 의사는 전혀 없다. 현실적으로 바꾸거나 보완할 수 없는 사안을 불평, 불만처럼 말하니 답답하고, 현실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말자는 취지였으니 오해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열악한 독신자 숙소 사정은 예산이 허락되는 한 보수가 되도록 해보겠다는 약속도 있었습니다. 오해는 풀렸으나 기관장의 당시 대사는 잠시 충격이었습니다. 검사와 똑 같은 대접을 받으려면 검사로 들어왔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은 달리 생각해보면 틀린 말도 아닙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사실 우리가 학생 때 그리고 젊은 시절에 공부하는 이유도 남으로부터 좀 더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사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할 이유가 없지요.      

나 아닌 타인의 마음이나 실상을 이해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나 자신의 일을 해결하기도 힘든 세상인데 타인의 마음까지 어찌 헤아려 살 것인가.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이나 어려움은 자신들이 극복해 나가야 하는 자신의 문제이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남을 탓해서는 아니 되는 것 아닌가. 나도 이 자리까지 오기까지는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겨우 이 자리에 왔다. 그 힘든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획득한 결과가 노력하지 않고 안주했던 당신들과 같다면 내가 했던 그간의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젊은 시절의 고생을 보상받고 싶은 누군가의 속마음을 제 생각대로 적어 보았습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획득한 결과가 노력하지 않고 안주했던 당신들과 같다면 내가 했던 그간의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너무도 당연하고 반박할 수 없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할 말이 없지요? 다만 남보다 인정받는 결과를 얻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기는 좀 어렵습니다.      


좀 지난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판사가 술을 마시다 술기운에 다른 사람을 때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판사에게 맞은 상대방은 많이 다치지는 않아서, 가해자가 판사가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몇십만원의 벌금으로 끝날 사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선고한 법원은 벌금형이 아닌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 했습니다. 판결의 취지는 이랬습니다. 

“피고인이 판사로서 누리는 무언가는 일반인과 동일하지가 않다. 따라서 피고인의 과오에 대한 책임 또한 일반인과 동일할 수 없다.”

멋진 판결입니다. 평소 판사로서 다른 이로부터 존경을 받거나, 대접을 받거나, 다른 이의 잘못을 꾸짖는 위치에 있는 등 일반인보다는 우위에서 누리는 부분이 있었겠지요. 그러니 그 책임 또한 일반인 보다 커야 한다는 판결입니다. 하지만 피고인인 판사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나 봅니다. 항소를 했다고 하니까요. 그 이후 판결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확인해보지 못했습니다만 피고인인 판사는 누리는 것은 일반인보다 많았으면 좋겠고, 책임은 일반인과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나봅니다. 판사가 되기까지의 수고를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거나,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만을 생각하는 본인 위주의 심리가 작용을 했겠지요.      


자신이 어려울 땐 어려운 사람이 이해되지만 어려운 상황이 아니면 어려운 사람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 상황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아예 생각하지도 않게 된다고 하네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논리실증주의와 분석철학자, 영국)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고 내가 그 고통을 이해하려면 그 고통을 상상해야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타인과 내가 동일한 조건하에서 동일한 감각을 가져야만 동일한 고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조건은 충족될 수 없고, 조건의 동일성 진위를 따질 수 있는 어떤 비교의 틀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문장의 모순을 말하는 것이고, 철학자의 어려운 말 그대로 철학이지만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맞다면 아이러니 하게도 그 기관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수사관이 말한 애로사항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애로사항을 말했던 모 수사관의 말처럼 검사에겐 관사로 아파트가 제공되고, 수사관들에게 원룸 같은 숙소가 제공됩니다. 수사관들은 숙소가 부족하면 2명 이상이 사용하는 불편도 감수하고 있습니다. 젊은 땐 그래도 좀 낫지만, 나이 들면 둘 이상이 한 방을 쓰는 것은 좀 힘들지요. 가족이면 괜찮겠지만 생판 남하고 좁은 방 하나를 같이 쓰기는 많이 불편합니다. 물론 수사관의 숫자가 검사숫자보다 3배가량 많고, 검사들은 매 2년마다 움직여야 하는 불편이 수사관보다 더 합니다. 다만 멀리 내다보면 방법도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내려진 예산이라면 합치는 방법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제가 근무하는 청의 재무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검사들에게 제공되는 아파트는 전세 1~2억 상당의 아파트라고 합니다. 그 정도 금액이면 제가 근무하는 소규모 지방 검찰청의 경우 1개청에 검사 관사 구입 및 임대비용으로 약 20억 이상이 들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검사들에게 제공되는 아파트 금액을 수사관들의 숙소 금액과 통합하여 검사나 수사관들에게 비슷한 규모의 숙소를 함께 마련하면, 모두가 지금보다 나은 시설에서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단기간에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일 것이고, 예산과 현 실정을 전혀 모르는 저의 생각일 수도 있겠으나 수년 전 모 기관장의 충격적인 발언이 생각 날 때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신 어려울 땐 어려운 사람이 이해되지만 어려운 상황이 아니면 어려운 사람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려다 기관장과 검사 관사이야기를 하게 되었네요. 저도 아이들 어렸을 적에 성적이 떨어졌다고 울상인 아이에게 ‘그러게 놀지 말고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그랬니?’라는 말을 가끔 했던 것 같네요. 아이 입장에서는 그게 맘대로 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말을 한다는 것이 참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다만, 속마음은 다르다 할지라도 표현의 방법을 달리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게 생각보다 공부가 쉽지 않지?”가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아이와의 대화를 계속 할 수 있는 표현 방법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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