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과 할복자살
"이민이란 내장이 튀어나와 길 위에 펼쳐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할복자살 같은 거죠."
마리아 투마킨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중
마리아 투마킨도 인터뷰한 누구의 말을 인용한 건데, 저 말은 조금 과격하게 들린다. 내장이 튀어나온다거나, 할복자살, 말이 다소 지나치다. 그런데도 심심하게 책을 읽다가 왠지 모르게 밑줄을 쳐두었다. 어딘가 치고 지나갔다. 말이 계속 맴돈다. 할복자살, 할복자살. 아직 내장은 안에 잘 있는 것 같은데...
나는 폴란드에 있다. 아마 일 년 더 살 것 같다. 내 원가족은 10년 전 이곳으로 이민을 결심했다. 나는 내내 한국에서 혼자 살다가, 장례식에 못 가는 악몽을 너무 여러 번 꾸어 결국 오게 되었다. 나이는 서른이다. 나이 서른 먹고도 엄마 없으면 그렇게 겁이 나니? 묻는다면 창피하다. 할 말이 없다. 이상하게 스무 살 초반에는 지구가 무너져도 살 것 같았는데 서른이 된 지금 되려 몸이 약해진 기분이다. 누가 지켜주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약하고 쓸모없는 생명 같다. 응, 우울증일 수도 있다. 꽤 오래된 이야기다.
폴란드에 온 지 곧 일 년째 된다. 어학원엘 1년 동안 다녔다. 말은 여전히 못 한다. 폴란드어는 어렵다. 얼마나 어렵냐면, 할복자살이다. 태어난 이래 늘 무기력하고 우울한 인간이었다지만 현재 내 우울증 지분의 7할은 바로 이 나라 말이다.
여기서 하나 고백해야 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마리아 투마킨의 호주 이민, 그 모든 디아스포라 문학을 비웃기 시작했다. 인도나 아랍권으로 이민 간 사람들은 비웃지 않는다. 유럽인이 중국으로 이민 간 경우도 겸허히 인정한다.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준다. 근데 호주? 호주? 뭐? 캐나다? 미국? 사바하사나. 내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성 마테오 리치 천주 승려뿐이다. 제기랄 뭐 얼마나 큰 세계라고 그 고생을 하셨는가!
폴란드어에는 격변화(Cases) 개념이 있다. 우리도 격이라는 게 있긴 하다. 목적격, 대격, 속격, 호격 등등. 그런데 우리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명사는 원래 형태로 사용하고 조사를 붙인다. 물론 이 조사 사용이 외국인들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 있다. 한국어를 아주 잘하는 외국인들도 종종 조사 실수를, 특히 주격 조사 실수를 많이 한다.
각설하고, 폴란드어는 명사/형용사 자체가 그 격에 따라 변화한다. 고유명사나 사람의 이름조차 말이다. 그것이 무려 -악명 높게도- 7개(* 각 격변화에 따라 인칭대명사도 다른 형태가 된다. '나는 그녀를 좋아해'의 그녀와 '나는 그녀에게 말했어'의 그녀 형태가 완전히 다르다.)가 있다. 그 7개는 다시 성과 수로 나뉜다. 자 벌써 경우의 수는 7X2X2이다.
그럼 동사 변형은 어떤가? 두 개 수와 세 개 성, (이때의 성은 문법적인 것이지만 경우에 따라 생물 무생물로 다시 나눠진다.) 세 개 시제가 있다. 물론 각각 끔찍하게 많은 예외가 존재한다. 재밌는 점은 성, 수에 따라 동사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주어는 늘 생략된다.(이유는 많이 다르지만 한국어도 회화체에서 주어를 늘 생략한다. 흥미로운 지점이다.) 더해, 에둘러 말하는 표현 스펙트럼이 있다. 최근에 배운 것이 영어에서 would could에 해당하는 문법이다. 여기까지는 스페인어나 독일어를 하더라도 비슷할 것 같다. 하물며 영어에서도 그 가짓수, 복잡성은 덜하지만 일단 존재하는 개념이다.
가장 최악인 것은 반복성, 지속성 유무, 행위 형태에 따라, 같은 말을 하더라도 다른 동사를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폴란드어는 하나의 뜻에 두 개+a의 aspekt가 존재한다. 결론인 즉 나 같은 외국인이 첫마디를 떼기 위해서는 대략 2X3X3X2.... 값의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와닿지 않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잠깐 대략 1000만 원 정도 투자한 늦깎이 어학연수의 결실을 자랑해 보겠다.
1) 앞서 말했듯, 일단 동사의 측면(aspekt)을 생각해야 한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일어나는 일인가?
나는 밥을 항상 6시에 먹어.라고 말할 때는 jeść라는 동사를 쓴다.
나 아까 밥 먹었어.라고 하려면 zjeść라는 동사를 쓴다. 일회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접두사만 붙여 다른 aspekt가 만들어진다면 푸념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종종 중간이 생략되거나 아예 새로운 글자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나 어제 6시부터 8시까지 밥 먹었어.라고 할 때는 또 jeść 를 쓴다. 지속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지금 밥 먹어.라고 말하려면 일회적인 사건에 지속성도 없지만 jeść 를 쓴다. zjeść 와 같은 일회적 성격을 나타내는 동사는 오직 과거와 미래형만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규칙과 전혀 상관없이 종종 관습에 의해 말하기도 한다.
괜히 먹다,라는 동사를 예로 든 것 같다.
가관은 '가다'이다.
불규칙하게 발로 가면 iść이다. iść의 일회적 성격 동사는 pójść이다. 현재는 iść로 말하고 과거와 미래의 일회적 사건은 pójść 를 사용한다. (사실 잘 모르겠다)
규칙적으로 발로 가면 chodzić이다.
뭐를 타고 규칙적으로 가면 jeździć이다.
불규칙하게 타고 가면 jechać이다. 이의 일회적 성격 동사는 pojechać이다.
이들 각각의 현재 미래 과거 단복수 동사변화도 기가 막히는데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만하겠다.
뭐, 앉거나 타거나 입거나 가져오거나 모든 동사에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2) 동사 aspekt를 정했다면 이제 여기서 성, 수, 시제에 따른 동사 변화를 해줘야 한다. 문제는 특히 시제에 있어서 이 동사변화의 일관성이랄 것이 규칙을 외우는 의미가 없을 만큼 약하다.
나 아까 밥 먹었어. 를 말하고자 할 때 동사 원형은 이렇게 생겼다. zjeść
여자 1인칭 zjadłam,
남자 1인칭 zjadłem,
2인칭과 3인칭까지만 해도 괜찮다. 어미만 바뀌고 앞의 형태는 같다.
그런데 수가 복수가 되면서 앞의 형태도 달라진다.
남자 복수 우리, zjedliśmy 여자 복수 우리 zjadłyśmy 등등.
아직 배우지 못한 명령문은 동사변형이 또 다르다는데 벌써부터 열받는다.
그래도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3) 그러나 맥 빠지는 지점은 각 이렇게 눈물 나는 동사변형을 해서 겨우 첫마디를 한 뒤,
동사마다, 전치사마다 사용해야 하는 격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해석 상 목적격이 나와야 하는 자리이지만 언어적 관습에 의해 장소격이 나온다거나, 시간은 장소격과 대격으로 말한다거나, 하는, 식, 이다....
여기까지만 하겠다.
그러나 한 가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불가능할 것은 없다. 하면 된다. 되기는 한다. 10년 정도 걸려서 그렇다. 괜찮다. 그래봤자 40살이다. 지금 이 공부로 치매예방이 되어서 건강하게 130살까지 살 것이다. 90살이나 남았다. KURWA!
여기 와서 언어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에 따르면 폴란드어가 고대어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아름답다고 한다. 영어 등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복잡성이 많이 탈각됐는데, 폴란드어는 여전히 그것을 지키고 있다나 뭐라나.
한편 또 누군가에 따르면 진짜 고대어적 성격을 가진 언어는 말레이어라고 한다. 미래형이든 뭐든 동사변화 없이 문장에 특정 단어를 하나 추가하거나 두 개 추가하는 식이란다. 좋은 의미로 아주 먼 과거에서 썼을 법하댄다.
너무 상충하는 말이다. 그러니 내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언어는 어쩌다가 단순해지고 복잡해졌는가? 무엇이 진짜 고대인가? 복잡한 것이 고대인가. 단순한 것이 고대인가? 어떤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복잡한 문법 체계를 갖게 된 것인가? 특히 동유럽은 오히려 여러 문화권이 교차하고 교역하는 지정학적 특성을 가졌는데, 왜, 도대체 왜, 더욱 배타적인 언어가 되었는가?(폴란드어 그 문법에서는 외국 이름을 대할 방법이 없다. 이상한 지점이다. 슬라브 민족끼리만 교류했다는 이야기일까?)
전부 다 거슬러 올라가, 바벨탑 때문인가? 그 교만의 저주가 폴란드에 내려 이 왕실의 성 이름은 바벨인가? 혹시 칭기즈칸이 그들이 잡아다 노예로 너무 많이 팔았기 때문인가? 민족주의인가? 그럴 리가 없다, 칭기즈칸은 한참 뒤 일이다. KURWA!!
한국어는 어떤가? 동사변형이 그럭저럭 복잡한 편이다. 아마 세 가지 정도 있는데, 그 규칙이 다른 언어 - 이를 테면 폴란드어에 비해 일관성 있고 엄격하여, 그 불규칙 변형까지도 한 번 배우면 금세 익숙해진다. 게다가 격, 수, 성 개념이 일단 없고 인칭대명사도 사용이 단순하다. 나는 내가 백범 김구 선생님 정신을 이어받아 너무나 민족주의적인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두려울 정도이다.
한국어의 단점은 1) 한자사용 2) 조사(그러나 나는 조사가 끝내주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3) 의성어의태어(근데 귀엽지 않나?) 4) 어미(한국어가 확실하게 어미가 풍부하다. 어미의 축복이 끝도 없다.) 정도이다. 아마 외국인 입장에서는 특히 한자 사용이나 의성, 의태어 사용이 너무 불합리하게 느껴질 테니 각각 일장일단이라고 하고 싶다. 속으로는 아니라고 외친다. 폴란드어가 제일 이상하다고.
만약 다시금 위대한 바벨을 쌓기 위해 하나의 언어로 통일하는 날이 온다면 내 제안은 영어, 한국어, 말레이어 중에 하나로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어는 가진 업보가 너무 크다. 아무래도 말레이어나 한국어나 좋겠다. 일본어도 나쁘지 않은데, 자연법상 전범국은 제외한다. 다른 대안적인 언어를 아는 분은 알려달라.
여기까지 쓰다가 유튜브에 폴란드 관련된 영상이 떠서 봤다. 내가 좋아하는 삼오사 채널이다. 마침 폴란드어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도 있는데, 폴란드 패널 두 사람이 하는 말. 한국어 공부가 쉬웠단다. 괜히 열받는다. 사바하사나.
https://www.youtube.com/watch?v=Ba0MoUep1Qg
폴란드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한다. 얼마 전 유퀴즈에, 한국어 공부만 몇 십 년을 하신 모 교수님이 나오셨다. 하시는 말씀이 그 언어를 배울 때는 "그 언어와의 정서적 연결고리"가 중요하다고.
이 말마저 어렵다. 어떤 연결고리를 말하는 건가? 정서적 연결고리,라는 말은 한국 시골의 한 다문화 가정을 떠올리게 한다. 화질은 UHD. 슬픈 발라드. 시어머니, 죽도록 밉지만 정이 들어서 당신 곁을 지킬 거야. 나도 폴란드 남자한테 시집가라는 말인가? 그래서 시어머니랑 지지고 볶고 하라는 말인가? 그 방법뿐인가?
말고는 이런 예가 있다. 덜 극단적이고 좀 더 친근한 예이다. 파리에 사는 모 군은 파리를 너무 사랑한단다. 한국은 너무 후지단다. 돌아가지 않겠댄다. 나는 속으로 욕했다. 사대주의자....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도 욕했다.(내용은 차치하고 말이다.)
이런 발란스 문제 또한 어렵다. 사실 모 군의 접근 방법이 맞다. 내가 여기서 살고, 적응하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여기에 어느 정도 빠져들어야 한다. 이 나라의 단점도 보지만 그 장점에 매료돼있어야 한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복잡한 생각이 맴돈다. 어떻게?
다시, 인용한 책 첫 꼭지는 호주에서 일어나는 10대 청소년 자살 문제를 다룬다. 그의 책은 도무지 좀 감정적이고 두서가 없다. 마치 나처럼 말이다. 상처받았다. 그러나 뭐로부터? 어쨌거나 책 속 호주는 오만방자하고 모욕적이고 잔인하다. 그건 <한국이 싫어서>처럼 이민 간 사람들이 겪게 되는 일과는 좀 다른 차원이다. 내가 모 군과 같은 이들이 신기한 까닭이다.
질문은, 결국 이민에 성공해서 그 나라 국민이 되면 그 나라의 태도와 현실을 다시금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받아들인 현실은 실상 전혀 가볍지 않다. 우리는 앞으로 다른 전쟁을 계속 치를 것이다. 만약 그때가 되면 또 이민 갈 것인가? 혹은 무국적자로 살 것인가? 아무런 정치적 태도도 갖지 않고? 혹은 그때는 그 나라의 사람이라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을까? 혹은 내가 너무 이야기를 크게 끌고 가나? 단순히 최저시급 문제일 뿐인데 말이다. 사회보장제도문제일 뿐인데 말이다. 혹은 단순히 환율 문제일 뿐인데 말이다!
어쨌거나 이것은 재밌는 주제이다. 내 친구 임은 일본에 산 지 2년이 되어간다. 일본 아이돌을 좋아했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에 빠져서 일본어 마스터가 되었다, 이후 도일하여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은밀한 혐일인이 되었다. 수많은 일본인 친구에 둘러싸여 신나게 놀다가 집에 가는 길에 분노의 전화를 한다. 임을 변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 혐한 정서? 직장생활 때문일까? 아니면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외국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주는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가 있는 걸까? 혹은 정말로, 일본과 한국처럼 많은 것을 공유하는 나라조차도 극복할 수 없는 벽 하나가 사람들 안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국민성이라는 감각- 고향이라는 것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내가 그리운 것은 그 나라일까 사람일까 문화일까 풍경일까 세이프 존일까 어린 시절일까?
도대체 사바하사나는 어디에서 구해지는 것인가?
글을 쓰다 보니 토요일이 되었다.
이만 자야 한다. 그만.... 그만.....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