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저2
수저1 이라는 글을 쓰고 대학원에 들어와서 나의 노력 여부와 상관 없이 또 누군가에겐 주어지고, 누군가에겐 주어지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봤다.
그리고 바로 든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 전공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같은 학부를 나온 사람들은 성적이 어떤지에 따라서 누군가는 가고싶은 연구실을 가고, 누군가는 가지 못하는일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내가 학부시절 얼마나 노력했느냐에 따라 달린 결과이기 때문에 수저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내가 어떤 전공을 선택했느냐에 따라서 다시 한번 수저가 등장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전공을 선택했느냐는 나중에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내가 하고 있는 전공이 정말 좋아서 간 사람들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나는 애초에 대학원을 갈 때 학부 때 전공이 별로였던 것을 만회하고 취직이 잘되는 곳을 선택했었기 때문에 이런 경우라면 어떤 전공을 선택하냐느가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대학원에 와서 지금은 정말 잘나가는 분야지만 10년, 20년 전에는 그 분야가 하나도 유망하지 않았을텐데 그 때 선견지명을 발휘해서 혹은 정말 그 분야를 좋아해서 대학원에 진학한 후 현재 교수가 된 교수님들이 정말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잠시 딴길로 샜는데, 아무튼 정말 그 분야를 사랑해서, 나의 어렸을 적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나는 꼭 이걸 전공해서 이 분야의 박사가 되어야지 라는 마음을 먹은게 아니라면 대학원에서의 전공은 정말 중요하다.
나도 물론 괜찮은 전공을 하고 있지만, 한때 나는 왜 반도체 관련 대학원을 가지 않았을까 라고 후회한적도 있었다.
어차피 내가 정말 좋아서 온 분야도 아니고, 나중에 먹고살기 위해서 왔다면 기왕이면 제일 돈 많이 주는 삼성전자 가면 좋을텐데 왜 나는 삼성전자에는 절대 비벼볼수도 없는 전공을 선택했을까 라며 후회했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게 많이 사라졌고, 내가 소속된 연구실 선배들이 회사건 연구소건 다 잘 진학하는 것을 보고 후회는 없어졌다.
회사를 가지 않더라도 전공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로 모든 학교의 또 모든 학과가 대학원 졸업 규정이 다르다.
하지만 대체로 IF 몇점 정도 되는 저널에 몇편 이상 논문 publish가 규정인 경우가 많다.
이 때 같은 학과더라도 어떤 연구실에서 하는 연구는 정말 핫하고 정말 주목을 많이 받는 분야여서 그 연구실에서 타겟하는 저널은 점수가 높은 반면에, 어떤 연구실은 정말 우리가 교과서에서 이름을 들었던 사람들이 하던 이론 관련 연구를 한다면 그런 연구실에서 타겟하는 저널은 점수가 낮을 수밖에 없다.
지금 한 말이 점수가 높은 저널을 타겟으로 하는 연구실은 좋은 연구실이고, 그렇지 않은 연구실은 나쁜 연구실이라는 말이 전혀 아니다.
어떤 분야인지에 따라서 다른건 어쩔 수 없다.
이와 관련된 단적인 예시는 다음 글에서 다뤄보도록 하겠다.
아무튼 위와 같은 현상이 발생하면 핫한 연구를 하는 사람은 그 분야에서 그렇게 알아주지 않는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더라도 졸업 조건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분야에서 최고의 저널에 논문을 내더라도 졸업 조건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실제로 내가 속한 연구실과 내 고등학교 친구가 속한 연구실에서 코웍을 진행하는데, 그 결과물로 논문을 어디에 낼지 각을 잴 때 우리 연구실 사람은 실망하는 저널을 내 친구네 연구실 사람은 매우 좋아하며 꼭 내고싶어 하는 일도 있었다.
두번째는 핫한 분야는 학교에서만 핫한게 아니라는 것이다.
학계에서 핫한 분야가 있으면 그 분야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각 학교, 각 단과대, 각 전공에서 그 분야와 어떻게든 연관을 지어서 해당 학과에 그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 사람을 교수로 앉히고 싶어한다.
어쩔 수 없다.
학교도, 학과도 여러모로 먹고 살려면 교수들이 내는 실적을 고려해야 하고, 핫한 분야는 앞에서 말한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실적이 잘 나오니까
내가 학부생일 때도 아주 젊은 교수님이 새로 부임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당시에는 나도 학부생이었기 때문에 교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실적은 가진 사람인지는 몰랐고, 사실 지금도 모른다.) 그 교수님이 학부도 별로고 대학원도 별로여서 학생들 사이에서 어떻게 교수가 됐을까 얘기가 많았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우리 학과의 교수님들 실적이 그닥 좋지 않았고, 그래서 박사를 하면서 실적이 좋았던 그 교수님을 학벌과 상관없이 모셔왔다더라 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 소문이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 교수님이 하시는 분야가 그렇지 않은 분야였다면 어떻게 교수가 됐는지는 영영 미궁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학교도, 심지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여러 연구소들도 (물론 실적 압박이 없는 연구소도 있다.) 그 시대에 핫한 분야를 무시할 수 없다.
회사도, 학교도, 연구소도 이런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면 이걸 무시할 수 있는 곳은 전 세계에 없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대학원에 진학할 때 어떤 전공을 선택하느냐가 나중에 수저로 작용할 수 있다.
내가 수저라고 표현하는 것은 나의 노력 여부와는 상관없이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저절로 기회가 주어지기도, 박탈당하기도 하는 그 선택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대학원에는 전공이라는 수저 또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