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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전문가가 아니었을까?

그 판단은 겸손의 탈을 쓴 오만이었다

by 구문도

나는 제조업 회사에 다닌다. 업력이 제법 있는 곳이다. 그래서 회사에는 전문가들이 많다. 나는 그들을 보며 위축된다. 왜냐하면 나는 이 분야를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히 재료공학을 전공했고, 그 전공을 살려 첫 회사를 다니다가 약간의 연결고리를 무기로 삼아 무식하게 이 회사에 지원했다. 첫 회사가 좀 문제가 있었던 곳이다 보니 환승 이직을 할 생각도 못했다. 회사를 관두고 두 달을 쉬고, 지금 다니는 회사 한 곳에만 중고 신입으로 지원을 했었다. 다행히 붙었고… 그리고 전공지식이 없는 연구원이 되었다.


이것은 내게 컴플렉스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주변에 메커니즘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연구원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아니… 나도 일을 할 줄은 안다. 엔지니어로서 이슈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정도는 이제 판단할 줄 안다. 회사 생활을 꽤 했으니 이론적인 부분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 생산 과정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일부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제품의 모든 면을 종합해서 판단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전문가야 말로 회사에 진정으로 필요한 인재이니까.


우리 팀장님은 우직한 사람이다. 회사에서 뭔가를 시키면 성심으로 다한다. 솔직히 나라면 그렇게 까지 수고스럽게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분은 한다. 내 기준에 이 사람은 회사에서 인재다. 어제는 팀장님과 성장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일정이 생겼다. 나라면 이런 건 대충 한다. 여태 겪어본 팀장님들 다 그랬다. 근데 이 팀장님은 진짜로 본인이 맡고 있는 스무 명가량의 직원들의 장, 단점을 꼽아가지고 성장 계획을 짜고 있었던 거다. 면담 중에 이야기가 나왔다.


“회사에서 도달하고 싶은 자리가 뭐예요? 전문가예요, 아니면 매니저예요?” 나는 전문가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사람의 마음을 조금 읽을 수 있는 면을 살려 차라리 매니저가 되겠다고 답했다. 팀장님의 답변은 그런 생각 자체가 틀렸다는 부분이었다. ‘전문성이 부족해서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은 섣부르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왜 미래를 한정 짓느냐? 나조차도 스스로가 전문가라는 생각을 안 한다. 그건 모르는 거다. 그 부분이 걱정된다면 차라리 앞으로 전문성을 쌓기 위한 행동에 돌입하자’


일단… 설득이 되는 옳은 말이었다. 나 스스로를 ‘못 될 사람’으로 규정하는 게 성장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조금 더 열심히 하다 보면 전문가라는 자리에 도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해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여기 까지만 납득하고 자리가 정리되었다. 그런데, 오늘 특허팀하고 이전에 아이디어를 제출했던 특허 네 건에 대해서 회의를 하게 되었다. 두 시간 동안 변리사님과 특허팀 인원에게 내가 왜 그렇게 특허를 냈는지, 그 이론적인 배경은 무엇인지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 두 시간 동안 이 주제로 강의가 가능하네?’


회의에서 질문에 답하면서 느꼈던 것이다. 나 생각보다 이 분야에 대해서 이제는 좀 아는구나? 적어도 변리사에게 설명 가능한 수준은 되는구나? 나 이걸 왜 몰랐지? 나는 비전공자로 회사에 와서 이 모든 지식을 배운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도 더 발전할 수도 있었다.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것이었다. 나는 팀장님과 지식의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그렇지만 그 사람조차 스스로를 전문가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칭하지 않으면 국내에 전문가가 100명도 안 남을 것임에도… 나는 나를 벌써부터 판단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 판단은 겸손의 탈을 쓴 오만이었다.


사실 이 오만은 자기 방어에서 출발한 것이다. ‘나는 남에게 비전문가로 보일 거야. 그런 말을 들으면 아플 테니까 내가 나에게 직접 먼저 해 줘야지.’ 그럴 시간에 차라리 논문 하나를 더 보지. 선입견을 가져서 뭐가 남는다고.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계속 글을 쓰면 어디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을 왜 할까? 일단 쓰고 봐야지. 어차피 쓰지 않고 살 수 없다고 판단 내렸으면서. 그러면 그냥 우직하게 써 보면 되는 것인데. 만약 도달하지 못한다면 어쩔 것인가? 의미가 없어지는가? 아니다. 의미는 ‘과정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때’ 자동으로 충족되는 것이다.


의심은 나의 핵이자 고질병이다. 나는 나를 의심하지 않고 살 수 없다. 숨 쉬듯 의심하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어? 지금 향하는 방향은 어디지? 이 방향은 옳은가, 그른가? 속도가 어느 정도인가? 언제쯤 목적지에 도달하는가? 그 목적지는 무엇을 보장하는가?’ 보장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도달하는 것이다. 의심의 벡터와 실행의 벡터가 합해지는 지점 위에 내가 있게 된다. 그게 내 자리다. 전문가란 자리는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유혹적인 도달점이지만, 사실 손에 쥐고자 하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외부자의 시선에서 전문가의 자리에 있다. 나는 이미 전문가이자 전문가가 아닌 것이었다. 모두가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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