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기록한 결핍의 얼굴들
내게 묻는다면 질문은 간단하지만 들려줄 답은 간단치가 않다.
누군가는 내게 소득을 꺼내놓고 누군가는 수치심을, 누군가는 아이의 상처를 서류에 담아 제출한다. 도움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 도움조차 닿지 못할 때가 허다했다.
내가 본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의 자유를 조금씩 빼앗아가는 구조였다.
그 구조는 삶 속에 스며들어 결국 포기를 일상의 기본값으로 만들어버린다.
TV 속 가난은 곰팡이 핀 벽지나 좁은 방으로 묘사되지만 진짜 가난은 그보다 훨씬 은밀하고 교묘하다.
수급 자격을 잃을까 두려워 절박한 순간에도 입을 다물고 이정도면 괜찮다 자조하게 한다.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에 사회에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숨는 법을 배운다.
그것이 그들의 생존 방식이었다.
가난은 배고픔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자격을 끊임없이 설명해야 하는 증명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 증명은 종종 스스로의 무능함을 입증해야만 가능한 잔인한 과정이었다.
990원의 기획상품 두부와 4,200원의 국산콩 100% 두부 사이에서 망설이는 엄마.
아에게 평생 저렴한것만 입혔지만 그래도 착하게 자랐다고 다독이던 어머니.
땀에 젖은 옷으로 마카롱 두 개를 계산대 올려놓고 너무 비싸 멈칫했던 아버지.
그 모든 장면의 끝에는 늘 같은 감정이 있었다. 미안함.
그러나 그런 미안함조차 가지지 못한 채 아이들을 남겨둔 채 삶을 포기해버리는 어른들도 많았다.
책임도 감정도 존재도 없이 아이들을 남긴 채 사라지는 어른들. 옆에 있지만 없는것 같이 사는 어른들.
그 뒤에 남겨진 아이들은 감당하기 너무 무거운 짐을 홀로 끌고 간다.
지금도 그들은 무언가를 포기한다.
한 끼, 한 숨, 그리고 언젠가는 희망마저도.
그 포기의 끝에서
나는 언제나 한 아이의 얼굴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