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의 무감정함
할머니는 내 앞에서 그토록이나 쪼골쪼골한, 커다랗던 손을 꼭 모으고 앉아 있었다. 어찌나 손을 쎄게 모으고 계신지 할머니의 손등 위로 혈관이 도드라져 보여 애틋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때의 나는 한 사람의 삶이 무너지는 데 얼마나 많은 서류가 필요한지를 아직 몰랐다.
"선생님..."
할머니의 쇳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우리 힘찬이 잘 부탁합니다."
그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며 아이가 뛰어들었다.
“선생니임~~!! 나 또 왔어욧!!”
둥근어깨의 커다란 강아지가 와락 돌진하듯 꺄르륵소리와 함께 작지만 커다란 몸이 내 옆에 철썩 붙었다.
볼이 발그레한 그 아이가 들어온 순간 공간의 온도도 교실 먼지의 색깔마저 바뀌는것 같았다.
교실 책상끝에서 아이가 색칠놀이를 하는 동안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할머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우울증 치료...아직 약은 안 드시는 거죠?”
할머니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지금 당장 병원 갈 처지가 아니에요.”
‘그 처지’ 라는 말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법원의 개인회생 절차를 밟고 있었다. 아들이 야반도주 한 후 알수도 없는 내용의 서류를 받아들고 확인한, 당황스러울만큼의 숫자가 적힌 감당할 수 없는 빚. 아들이 보증을 잘못 서면서 떠안게 된 돈. 사기당한 돈. 고금리 대출까지 얽혀 있었다. 할머니는 파산신청을 하면서도 이 결정이 자신의 손자에게 미칠 영향만 걱정하셨다고 했다.
남은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이자, 그리고 햇살같은 손자.
“할머니 제가 다시 한번 구청에 확인해볼게요. 파산 상태에서도 의료급여 2종이라도 받을 방법이 있는지요.”
하지만 할머니는 손을 저었다.
“아이구 내가 저번에도 그 서류를 내다 말고 돌아온 적이 있어."
그 시절, 파산자에게 닿는 복지는 너무나도 멀었다. 부양의무자 기준은 아직 폐지되지 않았고 연락이 끊긴 자녀조차 존재하는 가족으로 남아 있었다. 아무리 현실에서 부재해도 서류는 그들을 지워주지 않았다.
“힘찬이한테 내가 짐이 돼 더 힘들게 하네.”
나는 행정 안내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조건과 절차를 읊는 일이었다. 나의 위로는 종이에 적힌 조건 앞에서 속절없이 깨지고 있었고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는 우울증 진단을 받고도 약을 미뤘다. 비수급자 상태에선 정신과 치료비조차 부담스러웠고, 치료받을 기관조차 접근이 어려웠다. 긴급복지도 가족관계에 막혔다. 증명 없는 고통은 제도 밖이었다.
나는 민간재단에 구조 요청을 넣었다. 구두로는 긍정적 답변을 들었다. 하지만 그 빠르게는 결코 빠르지 않았다. 수많은 부서와 검토 속에서 한 주, 두 주가 흘렀다.
"정말 안타까운 사연이라 최대한 빠르게 지원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빠르게’는 원스톱이 아닌 수많은 부서의 결재와 왈가왈부 속에 사라졌다.
그 말이 반복되는 사이, 어느날 할머니가 말했다.
“정신을 차려보면...항상 높은 곳이라 식겁해.”
할머니의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며 나는 마음 한쪽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2주간의 약값을 우선 내가 개인적으로 지불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는 돈은 한사코 안 받으실 테니, 후원이 들어왔다고 말하고 일단 지원해드리면 그동안 기관의 연락이 오지 않을까? 그런 얄팍한 계산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내 ‘만약 선정되지 않으면 계속 내가 부담해야 하나?’라는 불안이 뒤따랐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돕다 보면 언젠가 나도 그들과 함께 무너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결국 그때의 나는 마음속에서 올라온 직접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조용히 지웠다.
할머니가 살아있었다면, 우울의 착시에서 벗어날 기회가 단 하루라도 더 주어졌다면, 남아 있는 아이는 더 따뜻한 어른 곁에서 자랄 수 있었을까.
재단의 입금 통보가 도착한 날 그 기쁜 소식을 할머니에게 나는 전하지 못했다.
그날 아침 ‘힘찬이를 부탁해요. 선생님이 있어서 다행입니다.’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늘 듣던 말이었지만 그날따라 마음이 이상하게 무거워졌다.
부담스러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스쳤다.
그 말이, 내가 정말 그 아이를 그렇게까지 품고 있는가를 묻는 것 같았다.
그날 오전, 내게 문자를 남긴 뒤 할머니는 세상과의 마지막 연결을 놓았다.
나는 그 문자를 오래 바라보다 한참이 지나서야 답장을 쓰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할머니의 가난은 기다림 끝에 무너지는 것이었다.
모두의 주저함이 만들어낸 비극앞에 나의 최선 너무 늦었다.
나는 그 늦음이 제도의 문제인지 나의 한계인지를 고민하며 충격적인만큼 바닥을 기었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단순히 돈이 없어서 사라진 것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회가 허락한 절차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절망 속으로 가라앉았을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끝없는 증명을 요구받는다.
자신이 충분히 가난하다는 걸, 충분히 절박하다는 걸, 그리고 충분히 무능력하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할머니가 일회성이 아닌 중장기적인 지원을 받으려고 거쳐야 했던 절차들은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그 모든 과정이 결국 그녀가 살아남기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도움을 요청해도, 그 절차를 감당할 힘조차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벼랑까지 밀려나는 모든 순간들이 쌓여간다. 그러다 마침내, 한 사람이 세상에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고 느끼는 곳에 서게한다.
나는 가난과 생의 마지막을 마주했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우리는 누구를 도와줬다. 구조했다고 말하지만, 종종 너무 늦게, 너무 멀리에서 그 말을 한다.
그렇게 구조는 늦었고, 손은 닿지 않았다.
그리고 남겨진 아이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상실과 함께 세상을 견뎌내야 했다
나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손들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그 손이 서류 대신 사람을 먼저 붙잡았다면,
이 이야기는 달라졌을까?
할머니의 약값은 2주에 8만원. 한 달 16만원 입니다.
저는 2주도 지원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이 아직도 부끄럽습니다.
당신은 저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