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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Nov 29. 2019

마음은 찰나를 먹고 자란다

올 한 해 당신의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었나요. 

상처 받았던 기억을 곱씹고 사는 사람의 마음은 자라나지 않는다. 상흔의 자리를 확인할 뿐 새살이 돋아나게 하거나, 흉터를 지울 힘은 없다. 마찬가지로 미래를 걱정하기만 하는 사람의 마음 또한 성장할 수 없다. 불안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날 뿐이다.


12월이 코앞이다. 인간이 걱정과 불안으로 한해를 채우는 동안, 나무는 어김없이 자라나서 벚꽃은 피고 지고, 열매를 맺고 단풍은 미련 없이 낙하한다. 부지런한 자연. 그렇게 또 한 해가 흘러가고 있다.



불안 속에 몰아넣는 뇌를 조련하자

마음챙김(Mindfulness)은 과거나 미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대신 그런 생각을 하는 '지금의 나'를 바라보게 한다. 내  마음속 TV에서 어떤 채널이 주로 켜져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한다. (단, 2분만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해보라. 그 2분 동안 끼어든 생각이 평소 당신이 자주 빠지게 되는 생각의 샛길이다.) 매일매일 내 마음속의 영상을 확인하면서 놀랐던 건, '똑같은 생각을 반복해서 한다는 것'과 ' 원치 않는 생각에 오히려 더 오래 빠져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해결되지도 않는 고민거리를 계속 안고 있고, 괴롭게 하는 생각에 더 오래 빠져있는 습관이 있다. 내버려 두면 그쪽으로 쉽게 끌려가는 마음의 특성 때문이다. 마음의 습관이다. 진화하면서 '생존'만이 곧 행복인 줄 알았던 뇌는(아니 사실 뇌는 행복을 몰라!), 긍정적인 자극보다 부정적인 자극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그 옛날 선조들이 위험요소를(이를테면, 뱀이나 호랑이)  빠르게 파악하여, 싸울지 도망갈지를 판단하기 위해 적응해온 흔적이다. 그 환경에 꼭 맞게 진화한 뇌라는 녀석은 현대의 도시가 얼마나 안전한지, 또는 AI 따위가 자신의 자리를 대체하게 될지에 관심이 없다. 우리를 위협하는 건 맹수가 아니라 막연한 미래라는 것 또한 모른다.


그런 뇌를 우리는 어떻게든 잘 달래고 조련할 수밖에. 겁 많고 소심하다고 움츠러들기보다 마음을 키우고 근육을 늘려야 한다. 단단해진 마음으로 보는 세상은 거친 야생이 아니라, 꽤나 즐거운 곳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찰나를 먹고 자란다. 

과거나 미래만 먹고서는 자라날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경험하지 못하고, 상념에 빠져있기만 하다면  또 그것이 지속된다면 마음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마치 자극적인 불량식품만 먹어대는 몸과 같을 것이다.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상처 받고 싶지 않다.'는 욕구에 있다. 편하게 살고 싶고, 고통은 피하고 싶다. 하지만 '괴로움'을 회피 대상으로 설정하는 데에서부터 더 큰 고통은 시작된다.


과거의 내가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이해받기 위해 애쓰고, 미래에 덜 상처 받기 위해 일어나지 않은 일을 계속 시뮬레이션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까. 스스로를 '피해자'로 남겨놓는 동안은 지금 여기의 것들을 온전히 느낄 수가 없다. 벚꽃도 단풍도 보이지 않는다. 현재로 초대하는 수많은 손짓을 놓치게 된다.


현재에 살기 위해, '고통'과의 관계를 바꿔야 한다.

당신과 고통과의 관계를 묻고 싶다. 고통과 함께하고 있는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괴로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넘어지면 아프고, 헤어짐은 슬프다.  만남과 이별이 자연스러운 것이듯 기쁨만큼 슬픔도 당연하다. 슬픔과 불안이 없는 사람을 '자연스럽다'고 하지는 않는다. 


인지행동치료의 제3동향인 '수용전념치료(ACT)'에서는 고통을 통제나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으로부터 마음의 치료가 가능하다고 본다. 건강함을 정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괴로움을 정상으로 본다. '고통의 정상성'이라고 표현한다.  심지어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괴로움을 겪지 않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고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괴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실존적 심리학에서 등장하는 신경증적 불안과 구분되는 '정상적 불안'을 떠올리게 한다. 불안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상황과 타인을 통제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고통은 더욱 커지는 결과가 발생한다. (우리는 나 아닌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으니까)


고통은 기쁨과 마찬가지로 삶의 여정에서 자연스럽게 마주하는 만남의 대상이다.




괴로움을 끌어안는 진정한 운명애, 아모르 파티(Amor Fati) 

만약 지금 우리의 삶이 영원히, 무한히 반복된다면 어떨까?  지금 이 순간이 다음, 그다음 생애도 동일하게 끝없이 반복된다면? 그래서 지금의 기쁨뿐만 아니라 모든 괴로움을 무한히 다시 만나야 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을 통해 이 순간이 이미 수없이 반복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조건 안에서 내게 주어진 운명, 그러니까 기쁨과 슬픔.. 괴로움까지 모두 긍정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즉, 나 자신과 내게 주어진 모든 운명을 사랑하는 운명애를 말하는 것이다. 김연자 씨의 '아모르파티'라는 곡명으로 더 유명해진 운명애(Amor fati)!!!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나를 괴롭히는 조건들을 탓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고통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삶,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수용전념치료에서 말하는 고통에 대한 시각과 연결된다.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괴로움을 끌어안는다는 것은 또 어떤 것일까.라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여전히) 삶이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리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우리가 살아내야 할 것은 '거대한 삶'이 아니다. 오늘 하루, 아니 지금 이 순간, 찰나다. 오직 찰나뿐이다. 그러니 가볍게 생각해도 좋다.


높은 파도를 두려워않는 서퍼처럼

 '죽어도 칼퇴를 해야 해!!'라는 믿음이 있으면, 퇴근 무렵에 생긴 업무가 더 괴롭게 느껴진다. '내 삶은 탄탄대로여야 해'라는 생각이 시험의 낙방과 구직활동을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 나는 상처 받고 싶지 않아. 나는 괴로움 없이 편하게 살 거야 라는 생각은 삶을 더 괴롭고 어렵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삶은 누구에게나 구불구불하고, 비탈길과 내리막길이 섞여있고, 나에게도 예외는 없는 것이라 받아들이면 어떨까. 그래서 어떤 길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다. 춤을 추며 나아가는 것이다. 높은 파도를 만나 허우적대는 게 아니라 스릴 있게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말이다. 


구덩이나 비탈길이 불행이 아닌 삶의 일부라 여기는 사람에게, 또 높은 파도도 두려움 없이 즐기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기꺼이 모든 '현재'가 선물처럼 다가올 것이다. 선물로 다가오는 모든 찰나를 맛있게 먹으며 살아갈 수 있을 테다. 



내가 기꺼이 지금 이 곳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고통을 껴안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내어, 지금 여기에서의 모든 즐거움과 괴로움을 기꺼이 만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또 그렇게 마음을 튼튼하게 지키며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올 한 해 어떤 생각들이 마음을 채우고 있었건 이제는 그 생각들을 미련 없이 보내주자. 그리고 12월은 12월의 기쁨과 슬픔을 충분히 채워가시길. 그 시간을 통해 한 뼘 더 자라날 수 있을 테니까. 






우리의 운명은 겨울철 과일나무 같아 보일 때가 있다. 
그 나뭇가지들이 다시 초록색으로 변하고 꽃이 필 것 같아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고,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영원회귀사상 : 니체 철학의 근본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개념이라기보다 니체의 체험적 사상에 가깝다. 삶을 온전히 긍정하고 사랑하는 운명애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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