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불안의 숲으로 걸어가는 당신
상담을 요청하신 분들의 상당수 고충은 두려움과 불안 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막연한 미래 때문에, 사랑 때문 에, 가족 때문에, 나약한 자기 자신 때문에 불안하다고 합니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모두가 어마어마한 불안을 가슴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친구들이나 지인을 만나도 빠지지 않는 주제이기도 하고요. 어떤 이야기도 가볍게 들리지 않는 것은 저에게도 비슷한 크기만큼의 불안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죠. 아무리 겉으로 씩씩하고 단단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내면의 어느 한 구석은 두려움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갓 태어난 아기처럼 연약해 보이고 안쓰럽게 느 껴집니다. 아군도 적군도 모두 불안에 있어서는 동지들일 거예요.
산다는 것은 결국 끝없는 불안 속을 헤쳐나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이 아닌 이상 우리는 앞날을 내다볼 수는 없으니까요. 미래, 그 ‘알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간다는 것. 그 불확실성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게 바로 불안이며 삶입니다.
그럼에도 정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불안이 높은 사람일수록 상황을 통제하려는 경향 이 강합니다. 연인, 부부관계와 같은 친밀한 관계에서 과도하게 주도하고 상대를 구속하려고 하죠. 겉으로 무척 강해 보이지만 내면은 그 반대입니다. 의연한 태도를 가진 사람의 마음보다 훨씬 취약해요.
상대방의 사랑이 식어버릴까봐 혹은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줄까봐 두려워서 연인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려 하죠. 불안한 부모는 자녀에게 엄격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믿기가 어려우니까요. 뿐만 아니라 막연한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워하면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청난 일이 닥칠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불안은 왜 이토록 우리를 더 고달프게만 하는 걸까요? 인간 존재의 핵심을 불안으로 보았던 철학자 쇠렌 키에르 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불안은 인간을 발전시키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요. 불안의 힘을 본 거죠.
맞습니다. 사실 우리는 불안으로 인해 그동안 성과를 내어왔습니다. 공부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사람들과 잘 지 내려 애쓰고 열심히 일하는 그 모든 것들의 아래에는 내게 이로운 적절한 불안이 있어왔던 겁니다. 불안을 통해 성장 해왔죠.
정신력이 강하기로 유명한 김연아 전 국가대표 선수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한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그녀는 컨디션이 좋고 잘 풀리는 것 같으면 오히려 불안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죠. 컨디션이 좋고 연습이 잘되는 날이 있으면 컨디션 난조로 몸이 따라주지 않는 날도 있으니까요. 그럴 때 일수록 컨디션에 연연하지 않고 늘 한결같이 훈련을 해왔던 게 실력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녀의 발전 또한 불안 덕택이라고 볼 수 있어요. 불안해 했던 건 오히려 경기를 지켜보던 국민들이었습니다.
2010년 벤쿠버 올림픽 당시 김연아 선수의 경기 직전에 일본의 아사다마오 선수가 깔끔하게 경기를 치르자 지 켜보던 사람들은 긴장했습니다. 혹시라도 김연아 선수가 심리적 영향을 받아 실수를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었죠. 하지만 정작 그녀는 훨씬 더 완벽한 경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당당하게 금메달을 따냈고요. 그 날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그녀에게 모든 경기는 그때그때 최고의 역량을 보여주 는 것일뿐, 누군가와 경쟁하면서 불안이 증폭되는 싸움은 아니었던 걸 알 수 있습니다. 불안한 눈으로 보면 경쟁자가 아닌 사람이 없고, 걸림돌이 아닌 게 없습니다. 즉, 불안이 불안을 만들어내는 셈이죠.
비관하거나 걱정할 이유를 찾아내는 데에 습관화되어 있으면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중독자처럼 불안해 할 만한 이유를 어떻게든 만들어내죠. 평안한 상태가 낯설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자꾸만 불안의 숲으로 걸어가는 거예요.
어떤 감정이든 우리를 옭아매지 않고 흘러갈 수 있어야 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불안에 중독되지 않기 위해서는 불안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요. 보통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해왔을 겁니다. 막연한 불안감은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불편한 감정일수록 대체로 회피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불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면 오히려 불안을 붙잡고 있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피할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어요.
마주 본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혼잣말이라고 할수도있고 나와 나 사이의 대화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 언어들은 어쩔 수 없이 어떤 감정을 유발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 정도는 너무 부족해. 더 잘해야만 해’, ‘왜 이렇게 한심하게 구는거야’, ‘빨리빨리 처리해봐’ 같은 자기비판적인 말이 가득한 날에는 조급해지고 초조할 수밖에 없겠죠. 또 ‘저 사람이 날 비난하는 것 같아’, ‘난 회사에서 쓸모없는 사람인 것 같아’, ‘이런 식이면 내 인생은 망했어’ 같은 주관적 판단으로 만들어진 말은 불안을 극대화시킵니다. 하지만 이런 언어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이건 단지 내 속에 흘러가는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감정에 개의치 않을 수 있습니다.
즉, 내 마음 속의 말을 하나하나 풀어보는 작업을 해보 는것입니다. 직접 써보는 게 가장 좋습니다. 아무도 나를 지켜보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노트에 적어보세요. 그러면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마음속의 말을 자유롭게 써내려갈 수 있을 겁니다. 생각보다 많은 언어를 알아차릴 수 있을 거예요. 그 다음, 그 수많은 말 중에 주관적 판단과 정확한 사실을 구분해내는 작업을 해보세요. 이 작업을 하는 이유는 대체로 정확한 사실이 아닌 혼자만의 판단으로 스스로를 불안하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의 대다수는 검증되지 않은 거짓 생각이라서 쉽게 나를 감정의 덫에 걸리게 할 수 있다.
_ 수전 데이비드Susan David, 《감정이라는 무기》, 북하우스, 37쪽
심리학자 수전 데이비드의 말처럼 검증되지 않은 생각들로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이 깨달음은 내 속의 이야기들을 마주하지 않는다면 결코 알 수 없어요. 있는 그대로 보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커다랗고 막연한 불안감’으로 존재하며 나를 무겁게 짓누르겠죠.
습관적으로 걱정과 불안을 안고 지내며 익숙한 듯이 불안에 중독된 삶을 사는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분들에게만 불안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걸까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말 그대로 습관입니다. 그 습관을 벗어날 수 있다면 걱정거리가 아니라 즐겁고 평화로운 일도 늘 함께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가벼워지겠죠. 습관을 바꾸는 방법은 앞서 다른 글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연습밖에 없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방법이지만 의식적으로 계속 사용해서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내가 생각 속에서 불안한 이야기를 계속 생성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주 알아차려야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사실과 생각을 구분하고, 생각의 덫에 걸려 있다는 걸 민감하게 알아차릴 때 ‘아, 나는 불안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겠어’하고 능동적으로 나아갈 수 있겠죠. 이 작업을 자주, 애써 해낼수록 그 경험들이 쌓여서 건강한 생각 습관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각 습관을 만들어가면서 삶 전체에 대한 생각 또한 점검해 볼 수 있다면 더욱 도움이 될 겁니다. 때로우리는 ‘편안하고 순탄하게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삶에 대한 기대를 실제 현실의 모습과 착각합니다. ‘삶은 순탄한 것이 다’ 또는 ‘내 삶은 순탄해야만 한다’와 같이 잘못된 믿음을 갖는 거죠. 하지만, ‘내 인생은 술술 풀려야 해’라는 생각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은 일상의 작은 삐걱거림조차 크게 받아들이게 만들어요. 괴로움을 증폭시 키는 거죠. 큰 시야에서 보면 잔물결은 늘 치고 있습니다.
개인의 삶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당연해요. 그럼에도 여기까지 왔듯이 어떤 모습으로든 앞으로도 나아갈 것입니다. 그렇기에 삶에 대한 현실적인 그림을 갖고 살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게 필요해요. 몇 군데가 고장 나서 조금 삐걱거리기는 해도, 또 자주 덜컹거리기는 해도 어떻게든 여기까지 걸어온 자신을 믿어주면 좋겠어요.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두 번 사는 게 아닌 이상 매일매일이 낯선 길인데, 미지의 세계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인간이 불안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 불안은 존재의 핵심이 맞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왕 함께 해야 한다면 불안에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고 살아가는 건 어떨까요? 불안에 중독된 삶이 아니라, 지혜롭게 동행할 수 있는 삶으로 말이죠.
위 글은 저의 저서 <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 중, [SNS가 아닌 현실에서 행복해지기를]이라는 제목의 글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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