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불안은 어떻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1화
안녕하세요. <불안이라는 위안> 의 저자 김혜령입니다.
저에게 다른 저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이라는 위안>의 저자라 소개한 것은
지금부터 '불안'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에요.
그것도 시리즈로 말이죠!
앞으로 무려 5회에 걸쳐 연재를 할 예정인데요, 우선 불안이 일상 속에서 우리를 어떤 문제에 빠지게 하는지 알아볼 것입니다. '불안'이라는 감정의 불편감 자체보다 그 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주목해 봅니다. 두려움이 어떻게 우리 삶을 조종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죠. 이후, 어떻게하면 불안에 잠식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차근차근 얘기나누도록 할게요. 제목 그대로 우리가 가진 불안이 위안이 될 수 있도록 이 연재를 잘 꾸려가 보고자 합니다.
덧붙여, 매화 글의 말미에는 불안을 다루는 실용적인 팁을 담아드릴테니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
이번 연재는 멘탈헬스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담(https://www.sadam.me/) 과 함께 기획했습니다.
<사담>에 대해서도 천천히 소개할 예정이니,
심리적 어려움을 덜어내고 싶은 분들은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려요.
정말이지 저는 불안감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늘 긴장되어 있고, 작은 사건도 크게 받아들이고, 많은 일들을 앞서서 걱정했어요. 불안한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계속 미래를 추측하고 계획하는 데에 엄청난 에너지를 썼지 . 그러다보니 생긴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역시 문제를 만들어내죠?)
첫 째로, 현재 하고 있는 공부나 일, 사람에 집중하지 못했어요. 행복의 제 1요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here&now(지금,여기를 온전히 경험하는 것)가 전혀되지 않았던 거죠. 두번째는, 점점 더 두려운 것들이 늘어났다는 겁니다. 불안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저의 대처방식이 오히려 불안감을 키우는 방식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두려운 것들로 변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혼자만 매일 재난상황을 겪는 것 같았어요. 피하려고 했던 일들이 끊임없이 더 많이 일어나는듯 했습니다. 어떤 날은 사는 게 너무 무서운 거에요. 생각해보세요. 우리 모두가 향하고 있는 '미래'는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미래. 불확실성과 통제불가능성이 더해진 앞날은 곧 나를 잡아먹을듯한 공룡과 다름 없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무서울뿐이었어요.
그러는동안 저는 신기할정도로 늘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들로부터 '차분해 보인다' 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훗, 내 연기가 잘 통하고 있군.' 하며 만족스러워했을까요? 아닙니다. 언제 제 연기가 들통날까 두려웠어요. 제 불안보다 더 싫었던 건, 누군가가 내 안의 겁쟁이를 알아채는 거였으니까요. 제 마음속의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이가 그대로 비춰져 '찌질이'로 보일까봐 겁이 났습니다. 어쨌거나 의식적으로 연기하지 않아도 될만큼, 저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데에 꽤나 고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담을 통해서 이 또한 불안에 반응하는 한가지 태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동물은 위협적인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세가지 대처방식이 있습니다. 투쟁(fight), 도피(flight), 경직(freeze) 입니다. 싸우거나 도망가거나 얼어붙는 거지요. 얼어붙는 방식은 사슴이 사자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했을 때 죽는시늉을 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죽는척을 하면 사자의 위협을 피할 수도 있기에 생존확률을 높이죠. 생존기제인 겁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신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기절합니다.
포식자의 위협을 받아 죽은척을 하는 초식동물처럼, 저또한 불안한 상황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을 하며 저를 지켜내고 있었던 겁니다. '불안한 나'를 나에게서 아예 분리해버리는 일종의 해리(dissociation)상태가 되는겁니다. 싸움, 도망 그리고 얼어붙기 모드는 결국엔 스트레스 자극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려는 반응입니다. (여러분도 일상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마주할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패턴을 파악해보세요.) 하지만 '얼어붙기'는 반복되면 무감각,공허감, 혹은 마비의 상태를 유발합니다. 아예 무뎌진 상태로 살아가게 되는거죠. 생동감을 잃어버립니다. 삶의 기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비극적이죠? 뿐만아니라 살아가면서 들어오는 자극을 효과적으로 소화해내지 못하게 하는 문제로 나아가요. (물론 이또한 삶을 살아가는 한 방식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요)
여기서 잠깐,
감정은 외부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신체반응이며, 이 반응을 통해 자극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해나갈 수 있어요. 그렇기에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매우 중요하고 소중하답니다. 많은 이들이 외면하며 살아가는 슬픔도 수치심도 분노도 모두 옳은 감정이에요. (별표 다섯개!!)
여하튼, 그렇게 살아가던 저는 문제의식을 깨닫고 언젠가부터 내 안의 불안을 돌보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책, 강연, 명상, 운동, 상담 등등을 찾아다니거나 배우러다녔고, 삶은 아주 천천히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책도 내고 상담일도 하는 지금의 저가 되었네요.
'수용전념치료' 라는 심리치료를 배우면서 치료에서 활용되는 작업을 실습 해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 중 하나가 미래의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상상하고 장례식장에 참여한 상황에서 몇가지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그 중 하이라이트는 묘비에 새길 비문을 적어보는 작업인데요. 비문은 곧, 나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나타내보는 것이기도 했어요. 삶을 통해 무엇을 실현하고 싶은지, 나의 인생이 어떻게 묘사되기를 바라는지를 생각해서 문장으로 정리해보는 것이죠. 앞으로 진정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고민해보게 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때, 저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렇게 썼습니다.
두렵지만 담대하게 살아내었다
즐거운 삶이었다
너무나 진심이었어요. 저는 담대하게 살아내고 싶었습니다. 삶의 마지막날에 눈을 감으며 '나 참 씩씩하게 살았구나. 사는 건 퍽 즐거운 일이었어.'라고 생각하며 잠들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살아있었고, 저 비문은 내 삶의 큰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했지요. 여러가지를 생각해내었고 그 것들은 지금 제 일상의 가이드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내 삶의 큰 중심이 묵직하게 잡힌 느낌이었지요.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이 지금 이 같은 글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아,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겠구나. 만약 나를 힘들게 했던 감정과 경험이 의미가 있다면 그건 비슷한 감정과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과 이어지는 것일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죠. 내가 피하고 싶어했던 그 큰 불안들이 나를 그저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큰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마리의 작은 강아지였을 때, 누군가에게 말을 해도 위안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 것을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나의 불안과 우울이 그저 '의지박약'으로 비춰지기도 한다는 걸 잘 압니다. 각자 자기 삶을 살아내느라 정신이 없기도 하고, 사람들은 타인을 단면만 볼 수 있음에도 쉽게 판단하고 평가하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가슴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때로 공통분모가 필요한 법이죠. (이런 면에 있어서 저는 '사담'을 꼭 추천하고 싶어요)
어쨌거나 저는 누구보다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로는 상담을 통해 지원군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고 확신했습니다.그런 생각을 하면 더이상 제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작은 강아지'가 아니라 그럭저럭 잘 살아내고 있는 한 인간이 되어있는 겁니다.
과거의 실수나 상처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에 집착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 여기'의 삶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삶 말이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나 미래로 자주 벗어납니다. 두려운 상황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늘 애쓰며 살아가기 때문이에요. 미래는 불확실성 그 자체이기에, 언제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그 때문에 미래를 걱정하고 통제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됩니다. 걱정하고 계획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죠. 그럴수록 현재에 집중할 수가 없고요.
하지만 불안을 기꺼이 경험하겠다고 결심하면 많은 것들이 달라집니다. 두려움에 정면돌파하며 차라리 불안과 친해질 수 있다면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오롯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삶. 그것이 곧 자유로운 삶이며, 나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를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불안을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는 무엇을 계속 피하며 살아왔는지,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해요. 그게 바로 자기돌봄의 시작이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요, 2화에서 다시 만나도록 해요!
* 분량상 많은 부분을 건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이번 연재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5화까지 잘 챙겨보셔요 :)
앞서 말했듯이, 감정은 자극에 대한 신체반응입니다. 본능의 영역이에요. 본능은 우리가 이성으로 통제하기 이전에 나타나는 거지요. '불안감'은 우리가 위협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도록 몸에서 경보를 울려주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시도때도 없이 경보기가 울리면 일상에 집중을 할 수 없겠죠. 그럴 때 우리는 뇌를 활용해서 조절할 수 있습니다. 이마 바로 뒤부분에 있는 '전두엽'이라는 부위는 인간이 고차원적인 활동을 하도록 돕습니다. 미래를 계획하고 충동을 통제하며 기억과 학습에도 관여하죠. 뇌의 사령관이라고도 불리우는 전두엽은 다른 부분들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불안감이 올라오는건 본능적인 반응이지만 전두엽을 작동시키면 이 불안감을 적절히 다룰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전두엽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이 바로 '언어' 입니다. 감정에 언어를 붙임으로서 본능의 영역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건너가는 것이죠. 한마리의 새끼사슴이 상황을 잘 대처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변해가는 것이라 보면 됩니다.
내가 경험하는 감정과 그 감정으로 인한 신체변화 등을 언어로 표현해보세요.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면서 '불안감이 올라왔구나.' '두려움에 압도되는 기분이야.' '손에 땀이 났네.' '긴장해서 어깨가 경직되었어.' 이렇게 표현해보는 것이죠.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돌볼 수 있게 됩니다. '알아차림'의 힘인데요. 관찰자로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미 감정으로부터 거리두기가 된 것입니다. 나를 감정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되면서 '불편한 감정'이 내가 다룰 수 있는 객체가 되는 거지요. 감정속에 풍덩 빠져있는 나를 건져내서 그 감정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감정에 언어를 붙인다는 것은 단순히 '불안감이 올라왔구나' 하고 이름을 붙여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상태에 대해 글로 써볼 수도 있지요. 일기를 쓰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과 대화 속에서도 가능하고요. 안전한 환경에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마음을 공감받고 지지받을 수 있다면 훨씬 쉽게 회복될 수 있답니다.
- 2030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대면 세션그룹
신청링크 => https://www.sadam.me/membership/?idx=21
* <사담>은 8인 이하 그룹으로 개인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멘탈 공유 프로그램입니다. 영미권에서는 이미 pace.group, real 등 다수의 그룹 세션 중심 온라인 멘탈케어 서비스들이 확산되고 있으며(참고링크 https://pace.group/), 다소 느리지만 국내 또한 조금씩 그 수요가 커져가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심리적 어려움으로인해 벽에 가로막힌 느낌이 들 때, 안전한 환경에서 고민과 걱정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한결 수월해질 겁니다. 저와 함께 <사담>에서 마음의 짐을 덜어보세요. (https://www.sadam.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