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불안은 어떻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5화
안녕하세요 김혜령 작가입니다.
오늘은 연재로 발행해 온 <불안은 어떻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의 마지막화에요.
4화에서 강조했던 공감적 관계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나눠본 후 연재를 마무리하도록 할게요.
회복탄력적인 뇌로 변화시켜주는, 그러니까 신경경로의 재배선을 촉진시켜주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공감'을 소개했어요. 이 때문에 관계가 중요해지는 것이죠. 반면에 고독은 인간에게 가장 해로운 독입니다. '외로움'은 마음만이 아닌 신체건강에도 치명적이에요. 타인과의 상호작용은 뇌를 늙지 않게 만들어줄뿐더러, 그 안에서 일어나는 공감은 치유와 회복의 힘이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왜 우리 마음은 시름시름 앓게 되느냐는 겁니다. 소외되고 상처받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나죠. 요즘은 온라인세계가 커져서 사람들과 24시간 연결되어 소통하기도 하잖아요. 이렇듯 우리는 분명 늘 함께하는데 공감적 관계가 쉽게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오히려 외롭고 더 연약해지는 걸까요.
우리를 외롭게 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내리는 판단과 평가입니다.'나' 라는 존재가 있는 그대로 존중되지 않고 평가의 시선에 놓여있다면 그건 타인과 '연결'되고 있는 것이 아니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타인을 쉽게 정의 내리거나, 지적을 한다거나, '어디한번 잘하나 보자'라는 눈으로 문제점을 찾아내려 합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이런 실수를 많이 저지르게 돼요. 이 사실이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듭니다. 가족이라서, 친구라서 나를 다 아는 것처럼 하는 말들이 더 상처가 되곤 하죠.
'내가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거야.' 라는 말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수 있는지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실 거에요. 사람들은 나의 고민에 '정답'을 말해주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정답'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고민을 해결하기 이전에 내 마음의 불안이, 분노가, 수치심이 수용되어지길 바라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죠.
때문에 오히려 생판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공감과 지지를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나에 대해서 안다고 전제하지 않고, 대화 자체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공감적 관계는 그 관계가 얼마나 오래되었느냐, 얼마나 친밀한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마음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그저 상대를 나의 잣대로 보지 않고, 그 마음에 함께 머무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회사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며 저에게 상담을 요청해오셨던 J씨는 가족관계도 친밀하고 친구도 무척 많은 분이셨는데요. 상담을 찾게 된 계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주셨어요. 가족들은 걱정시키기 싫어서 솔직하게 말하기가 싫고, 친구들은 만나고 돌아올 때마다 후회 하는 일이 많이 생겼다고요. '이 말을 괜히 했나.' '거기까지는 말하지 말 걸 그랬나.'하는 생각과 때때로 나의 옹졸함을 들킨 것 같은 기분도 불편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가족과 친구들은 자신의 고민에 대해 항상 해결책을 제시해주려고 하는데 대화가 끝나고나면 오히려 공허감이 들었다고 해요. 사람들은 다 맞는 말을 해주는데 마음은 오히려 텅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이는 대화 속에서 진정한 '공감'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감을 통해 마음은 보살펴집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마음을 돌보는 일은 별개거든요. 마음으로 접근해야하는데, 잘잘못을 따지는 판단과 평가는 '내가 잘못한 점'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합니다. J씨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 것이 우리 사회에 결핍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을 엄격한 잣대로 바라보면서,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누가 맞고 틀린가' '누가누가 잘하나' 의 시선만 가득하죠. 타인이 지옥인 것은 이처럼 심판관 같은 시선으로 다가오기 때문인 거죠.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관계 속에서 관심과 사랑,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모두의 마음 안에는 사랑과 신뢰로 채워져야 할 공간이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이 공간을 '마음속의 정원'이라고 합니다. 사랑과 인정은 토양이에요. 어렸을 때 적절히 토양이 다져져 있으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습니다. 그러면 살다가 어느정도 결핍이 생겨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잠깐 소외되거나 비난을 받아도 이겨낼 힘이 있어요. 이미 나에게는 충분한 열매가 있으니까요. 혼자있는 시간을 견딜 힘이 있죠.
그런데 어렸을 때 여기에 큰 구멍이 생기면, 계속해서 관심과 사랑을 채우는 데에 애를 쓰게 돼요. 매일매일 갈증을 느끼죠. 그러면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로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위한 몸부림, 과장된 행동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가면은 더욱 두꺼워지고요. 혹은 반대로, 관계를 아예 포기해버리게 돼요. 적절히 연결되어 살아가야 하는데 더 상처받기 싫으니 아예 모두 차단해버리고 혼자가 되어버립니다. 이 또한 마음의 정원에는 어떤 것도 피울 수 없게 해요. 공허한 상태로 살아가겠죠. 문제는 두쪽다 엄청난 불안감을 안고 산다는 것이에요.
타인을 대할 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해보세요. (연습이라고 말씀드리는 건, 이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눈빛과 몸짓, 상대가 하는 말 속에 담긴 진짜 마음에 집중해 보세요. 그 것이 곧 '인정'이고 '사랑'이며 진짜 관심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위안이에요. 내가 있는 그대로 수용되는 느낌. 내가 어떤 결함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나'로서 충분하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관계안에서 자연스럽게 공명이 일어나고, 회복탄력성을 키워가고,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단단한 마음이 되어갈테지요.
내가 당신 마음에 들고 당신에게 중요해진 건 내가 당신에게 일종의 거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내 내면에는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에게 답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요. 본래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상대를 위한 거울이어서 서로 답을 주고받고 서로 조응하는 거지요.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중에서 -
내 안의 불안을 돌본다는 건, 마음 안에 안전한 집을 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두렵고 괴롭고 힘든 순간이면 언제라도 그 집에서 쉴 수 있어야 해요. 내가 나의 가장 안전한 집이 될 수 있도록 토양을 만들고 집을 따뜻하게 관리해야 하는 거죠. 스스로를 믿을 수 있고, 또 타인과 건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불안한 순간들을 비료삼아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연재 첫화에서 소개했던 저의 비문을 기억하시나요. 죽은 후에, 내 인생을 한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럴 것이다. 하고 소개했던 문장이요.
두렵지만 담대하게 살아내었다.
즐거운 삶이었다.
이 연재를 읽고 계시는 모든 분들의 삶이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삶, 그래서 너무나 불안한 삶이지만 담대하게 살아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삶이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마냥 두려운 게 아니라, '삶이 나를 어떻게 끌고 갈까'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치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삶의 흐름에 나를 내맡기는 것이죠.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 위해 부디, 자신의 불안을 이해하고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불안은 반드시 위안이 될 수 있다고 감히 말씀드리며.
연재 끝.
멘탈헬스 서비스 [사담]은 심리상담사의 진행 아래에, 특정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온라인 그룹세션입니다. 비슷한 심리적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지지적이고 공감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관계지능을 높이고, 회복탄력성이 길러지지요. 공감적인 대화 속에서 마음의 짐을 덜어보세요.
- 2030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대면 세션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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