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 두려운 당신에게
“우리 뭐 먹을까?”
“나 결정장애 있잖아. 네가 정해.”
사람들을 만나 식사 메뉴를 정할 때 자주 나타나는 대화 패턴이다. 이왕이면 더 맛있는 걸 먹고 싶어 망설이는 즐거운 고민이 참으로 비장하다. 결정장애라는 용어는 선택을 지나치게 망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생긴 신조어다. 유사한 단어로 ‘햄릿증후군’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에서 주인공이 결정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병으로 진단하지는 않지만 전문가들은 오랜 시간 몸에 밴 습관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습관은 어떻게 형성된 걸까.
첫 번째는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할 필요가 없었던 성장과정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 결정을 확신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결정의 순간마다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왔거나 그렇게 강요되었다면, 성인이 되어도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낯설기만 한 선택의 기로에서 불안해하고 타인에게 의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결정 행위가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지나치게 늘어난 정보의 범위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방대해졌고 선택의 폭이 늘어났다. 좋은 것들이 생겨났고 더 좋은 것들이 계속해서 빠르게 생겨난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얻고자 ‘검색 찬스’를 이용하지만, 불행히도 인터넷 검색은 더 큰 혼란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인 데다 곳곳에 광고까지 섞여 있어 진실을 선별해야 하는 과제까지 추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본인이 결정장애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정하는 행위에 익숙하지 않은 성장과정, 늘어난 선택의 폭, 예고 없이 뒤통수치는 사람들, 완벽한 선택을 하고 싶은 욕구까지 합쳐져 선택의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결정에 서툰 것 자체가 어떤 질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경향성이 지나칠 경우에 우울증, 의존성인격장애, 강박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결정을 지나치게 주저하는 습관의 ‘진짜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결정을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은 선택을 타인에게 넘기려고 한다. 하지만 타인이 결정해준다고 해서 그 결과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타인에게 결정을 넘긴다는 것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넘기는 것이다. 그 결정에 따른 부정적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두려움까지 넘겨버리고 싶은 것이다. 이 또한 기저는 불안이겠으나 크고 작은 결정들이 자신의 인생을 좌우한다고 생각할 때, 어떻게 타인이 결정하도록 맡길 수 있겠는가. 남한테 맡긴다고 그에 따르는 책임까지 그가 짊어져주지 않으므로 중대한 문제 앞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가 있다.
국내의 한 정신의학자는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결정이 옳았는지 타인의 확신에 매달릴수록, 결정에 대한 만족도는 점점 떨어진다면서 오히려 자신의 직관을 믿으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결정이 어려운 이들은 항상 완벽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니까 결정장애를 자처하는 이들은 우유부단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완벽주의자형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완벽한 결정을 원하는 것이다. 이 동기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완벽주의자들은 여러 문제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다.
심리학에서는 완벽주의(perfectionism)에 대해 ‘매우 높은 기준을 갖고 완전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자신을 엄격히 평가하는 성격특질’로 정의한다. 문제는 이 ‘매우 높은 기준’ 탓에 완벽주의자들은 만족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삶의 여러 방면에서 크고 작은 만족감은 상당히 중요하다. 신체만족도, 결혼만족도, 직무만족도, 사회적관계만족도 등은 심리학에서 불안, 우울과 관련해 자주 연구되는 주제다. 우울증이 완벽주의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좀처럼 만족하는 법이 없으니 삶에서 좀처럼 기쁨을 찾기가 힘든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찰스 다윈, 윈스턴 처칠 등 역사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이들이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작가 대니얼 클라인은 자신의 저서에서 “완벽주의란 온전한 성취감을 절대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데는 완벽한 방법이다”라고 꼬집는다. 완벽주의와 자살충동을 관련지은 연구에 의하면 그들은 높은 기준 때문에 벽에 부딪힌 느낌과 깊은 좌절, 그리고 희망이 없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 《완벽주의의 함정》을 쓴 클라우스 베를레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려는 사람들의 기저에 두 가지 기본원칙이 깔려 있다고 본다. 첫째는 충분히 노력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 둘째는 모든 것에 충족되어야 할 이상이 있다는 관념이다. 하지만 그는 이 같은 지상명령에 기초한 완벽주의의 가정은 단 한 번도 옳았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행복학자로 손꼽히는 탈 벤 샤하르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는 완벽주의자들의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사고방식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완벽주의자는 항상 최적의 상태에 도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패배를 극도로 두려워한다. 그래서 위험을 피하려고만 들다가 기회까지도 놓치고 만다. 이를 ‘성공 거부 반응’이라고 표현한다. 완벽주의자는 시도하지 않으면 실패도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주 과제를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햄릿증후군의 원인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잘못된 결정을 통해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보느니 애초에 결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람들 얘기를 듣다 보면 이 세상이 마치 정답으로 이뤄져 있는 것만 같다.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는 공무원이 정답이고, 30대 중후반이 넘기 전에는 결혼을 해야 하고, 더 늦기 전에 아이를 낳아야 한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유와 개성을 미리 재단하여 그 범위를 한정해버리는 것이다. ‘완벽한 정답’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결정은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는 정답을 맞히면서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만 삶이 서너 가지 정답으로 뭉뚱그려지기엔 우리의 개성과 인격은 너무나 구체적이다. 백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만 개의 세계가 있다. 당연히 백만 개 이상의 선택이 발생할 것이다. 결정을 망설이고 미루는 것은 ‘정답이 있는 세상’과 ‘나만의 세상’과의 갈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답은 없다는 것만이 이 세계의 유일한 정답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선택했을 때 그 이후가 무척 중요해진다. 최선을 다해 그 길을 정답으로 일궈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어느 날 돌이켜봤을 때, 그때 그 선택을 참 잘했다고 만족하는 것을 넘어 무엇을 택했건 그 이후의 태도와 노력에 스스로 박수를 보낼 수 있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완벽한 결정은 없다. 단지 최선만이 있을 뿐이다. 나의 결정이 최선이었음을 믿어주고 거기에 온 힘을 쏟아 최고의 결정으로 만드는 일은 자신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