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이라는 불안
퇴근이 늦었던 어느 날, 집에 수도가 끊겨 있었던 적이 있었다. 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으니 당장 씻을 수도 없고 대소변을 보는 일도 곤란했다. 내일 아침까지 해결하지 못하면 출근도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니 깜깜했다. 한 시간 만에 원인을 찾고 해결할 수 있었지만 수도가 끊긴 늦은 밤 잠깐의 순간 동안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주 당연하게 여겼던 것 중 하나가 빠진 건데, 일상 자체가 흔들리며 오로지 그 문제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삶의 ‘마이너스’ 상태는 그런 것이다.
당연히 갖춰져 있던 것이 갑자기 없어져서 곤혹스러운 상황에서는 평범함의 가치를 생각하게 된다. 그저 보통의 삶을 살고 싶은데 그것마저 어려운, 치열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 식구 밥그릇 챙기는 일, 평범한 일상을 되찾으려는 마음은 이처럼 마이너스를 제로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일상을 되찾기만 하면 우리는 충분히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사회는 또 하나의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듯하다. 요즘에는 보통의 기준이 너무 높아져버렸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평범한 삶은 초라하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여성들은 TV와 스크린 속 스타들의 깡마른 몸매를 보면서 표준몸무게 계산법을 잊은 지 오래다. 남성들은 ‘초콜릿 복근’이 없는 자신의 복부를 부끄럽게 여긴다. 어디 외모뿐인가. 부의 기준, 행복의 기준까지도 내면으로 가져와 무의식까지 지배당한다. 온라인 세계에서 연예인 이상으로 높은 관심을 받는 사람들은 영화배우 못지않은 외모와 값비싼 맛집 혹은 여행 후기를 뽐내거나 명품 패션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심리연구자 브레네 브라운은 이 같은 풍경에 대해 우리가 리얼리티쇼와 유명인 중심의 문화 속에서 ‘평범한 삶은 의미가 없다’는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편향된 세계관을 갖게 된다고 지적한다. SNS를 통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타인들의 모습이 보통의 기준을 상향평준화하거나 평범한 삶은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문화에서는 실제로 평범해지기도 어렵지만 끊임없이 자신이 부족하다는 자기평가를 하게 된다.
또한 온라인 공간이 사람들 간의 연결고리를 확장시키면서 스스로를 남의 시선에 함몰시키기도 한다. 내가 타인의 모습을 훔쳐보듯 나의 모습 또한 타인의 시선 안에 머물면서 영향을 받는다. 철학자이자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을 결정하고, 성공을 거둔 걸출한 친구에 대한 소식은 불안을 유발시킨다고 현대사회의 불안을 분석했다. 그러면서 불안의 원인 중 하나로 ‘속물 근성’을 꼽는다. 속물 근성은 하나의 가치 척도를 모든 이에게 들이대는 것을 말한다. 일부만으로 사람됨 전체를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속물 근성의 잣대는 그 화살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불안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이처럼 매체들에 의해 만들어진 열등감과 불안감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무언가를 계속 욕망하게 만든다. 브레네 브라운은 우리가 스스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이 ‘네가 부족해서 그래’라는 분위기 탓이라고 설명한다. 또 사람들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에 자신을 맞추지 못해서 힘겨워하고 수치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 속에서 내면에 심어진 내적 결핍은 또다시 무언가를 갈구하는 악순환이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너무나 평범하고 부족한 존재라서 괴로울 때 명예와 지위와 찬사를 갈구하는 느낌은 강력한 진통제와 비슷하다.
-브레네 브라운
그래서 현대사회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삶이 언젠가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을까?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다소 비관적인 미래를 내다본다. 그는 현대사회에 새로운 의미의 가난이 퍼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현대화된 가난’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곤궁한 경제력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이 상품에 중독되거나 시장에 집중하는 문화적 변화를 가져왔고, 돈이면 다 된다는 신념이 퍼지게 되었다. 본질을 잃어버리고 인간마저 상품화되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정신의 자유를 잃어버린 빈털터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지나친 풍요에 질식된 가난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재능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고,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환경조건을 조절할 힘을 빼앗겼고, 외부의 도전과 내부의 불안을 이겨낼 자신감을 상실했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중에서
이렇듯 자본의 풍요는 아이러니하게 모두를 가난하게 만들었다. 소비의 시대, 상품이 넘쳐나는 시대, 상품이 사람을 대신하는 시대에서는 모두가 풍요로워 보일지언정 모두가 가난하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신념은 가장 중요한 것을 보는 눈을 잃게 한다. 남의 아름다움만 쫓느라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놓친다. ‘좋아요’의 개수나 타인들의 관심이 개인의 가치를 결정짓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상품과 같은 방식으로 등급이 매겨지기도 한다.
결국 일리치가 비판하는 사회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장 크게 잃은 것은 우리 자신의 가치다. 더 정확히는 ‘중요한 의미를 볼 줄 아는 영혼’이다. 눈에 보이는 하나의 잣대로 자신을 평가하게 되었고 평범함마저 가치를 잃었다. 보통 사람, 보통의 날들이 가지는 진가를 망각하고 거짓 풍요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어떤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느냐고.
대학 때 나의 하숙방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그 대신 작은 라디오를 머리맡에 두고 항상 켜두었다. ‘집순이’였던 나는 잠깐의 공강 시간에도 집에 들어와 쉬다 가곤 했는데, 덕분에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라디오를 들으며 보낼 수 있었다. 특히 디제이가 청취자들의 사연을 읽어주는 시간을 좋아했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고 마음을 저미는 슬픈 사연도 있고 민망해지거나 화가 나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이 시대 엄마들의 이야기, 이모와 삼촌들의 이야기, 내 이웃의 이야기였다. 또래의 이야기는 마치 내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 그야말로 보통 사람들의 보통 이야기였다. 이야기 안에서 내 일상의 슬픔이나 분노, 웃음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때로는 초라함 뒤의 화려함을 배웠다.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 속에서 귀중한 무언가를 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여성시대>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22년 넘게 활동한 박금선 작가는 사연을 통해 만난 무수한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나를 무난히 나이 들게 해주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들은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았고, 생활에 아등바등하면서도 때로 초연했고, 자기 가족을 챙기면서도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분들이라 내게는 큰 스승들이었다.”
우리가 평범함의 불안에 갇힌 것은 이런 라디오 사연과 같은 이야기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그 자리는, 어떻게든 조회수를 높이려고 초단위로 업데이트되는 자극적인 기사들과 화려해 보이는 SNS의 반쪽짜리 모습들이 대신해버렸다.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진짜 대화가 실종된 사회에서는 모두가 가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불안할수록, 나의 보잘것없는 일상이 쓸모없다고 생각될수록 ‘일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스타들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여보면 그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귀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애초에 눈과 귀를 사로잡을 목적으로만 던져지는 것들에 시선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영영 영혼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