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는 것보다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
청소년기의 나는 감수성이 예민했기 때문인지 기분을 민감하게 느끼고 감정 변화를 세심하게 살폈다. “불안해”라는 말을 자주 썼던 건 그만큼 내 마음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뜻일 것이다. 나중에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감정을 언어로 표현했던 것은 잘한 일이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진 것도 내게는 도움이 되었다. 이는 실제로 심리학에서 감정을 다루는 방법으로 제안하기도 하는 ‘감정 라벨링’이다.
정서 명명하기라고도 하는 감정라벨링(affect labeling)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내가 ‘불안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음에 일어나는 일들을 언어화하는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성적인 활동이다. 이름을 붙이면 감정은 본능의 영역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이때 뇌 속에서는 사령관 역할을 하는 전전두엽과 부정적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의 통로가 회복된다. 전전두엽이 브레이크 역할을 하기 때문에 편도체가 지나치게 활성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신경과학 분야의 권위자인 매튜 리버먼은 감정라벨링이 부정적인 감정에는 더욱 효과적이라고 하였다. 우는 아이에게 “울지 마, 뚝 그쳐!”라고 다그치는 것보다 “많이 속상했구나. 서러웠구나”라고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면 충분히 울면서 감정이 사그라드는 것과 같다. 아이가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언어화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자신의 정서를 인식하는 일은 마음을 다루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 있으면 그 감정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마치 미로 속에 있으면 내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멀리서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어디쯤인지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격한 슬픔 속에 있을 때는 감정과 내가 분리되지 않고 ‘슬픔=나’의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틈이 없다. 감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보면 객관적으로 인식이 가능하다. 이처럼 한 걸음 떨어져서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인식하는 것을 ‘메타무드(meta-mood)’라고 한다.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순식간에 분노가 내 마음과 몸 전체를 압도한 기분이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몸이 부르르 떨리는 신체반응도 따른다. 통제할 수 없는 상태다.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물러나서 감정을 인식하고(메타무드),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통제가 안 되는 상태야.’ ‘분노지수가 상승해서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려’라는 식으로 언어화하면(감정라벨링) 훨씬 다루기가 수월해진다.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는 마음을 다루는 일과 뗄 수 없는 관계다.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다. 마음에서 떠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우리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불안감도 마찬가지다. 내 안의 두려움을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는가는 불안을 다루는 데 핵심적인 문제다. 임상심리학자 로버트 마우어는 오랜 기간 두려움에 대해 연구한 결과물을 《두려움의 재발견》이라는 책에 담았다. 그는 우리가 두려움을 느낄 때 보이는 잘못된 반응들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잘못된 반응을 우울증, 분노, 협상, 불평, 먹기, 걱정, 약물의존 등 크게 일곱 가지로 정리한다.
일곱 가지 반응 이외에 우리가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다. 그것은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다.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은 인류가 앞을 내다보고 계획하고 창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미래를 가장 비극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도 동반되었다. 리사 랜킨은 저서《두려움의 치유》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함정’의 한 사례로 자신이 치료한 여성의 사례를 소개한다.
그 사람을 너무도 사랑해. 그래서 이런 감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견딜 수 없어. 내가 우리 사이를 엉망으로 만들어서 그 사람의 사랑이 식어 나를 버리면 어쩌지? 나보다 매력적인 여자가 그 사람을 빼앗아 가면? 그 사람이 내 진짜 모습을 보고 내가 살짝 신경과민이란 걸 알면 어떡해! 그 사람이 병에 걸리면 어쩌지? 행여나 먼저 죽으면? 이건 너무 위험해! 그 사람을 잃으면 난 견딜 수가 없어. 그를 덜 사랑해야겠어. 이런 감정에 너무 빠지면 안 돼. 조심하는 게 낫겠어. 그러면 상처를 입더라도 별일 없을 거야.
-리사 랜킨, 《두려움 치유》 중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려보는 일은 결국 그녀와 연인의 관계를 망쳤다. 최악의 상황을 그려보는 것이 함정이 되는 건 연인 관계만은 아니다. 비행기가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비행기를 절대로 타지 않는 사람도 있고, 초등학생인 아들이 혹시나 납치라도 되면 어떡하나 하는 상상 때문에 친구들과 밖에서 노는 일도 지나치게 통제하는 엄마도 있다. 이들은 비극적인 상황까지 상상하면서 어떻게든 대비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대비는 실제로 두려움을 줄여주는 전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그려낸 비극적인 미래를 감당하느라 현재 누려야 할 것들을 놓쳐버리기도 한다. 습관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그려내면서 매 순간을 불안으로 뒤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노로 표출하거나 최악의 상황을 그려내지 않고서 불안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매튜 리버먼은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감정을 조절하는 뇌 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발견했다. 명상은 동양에서 시작되었지만 서양에서 연구를 통해 과학적 근거가 뒷받침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구글의 창립 멤버였던 차드 맹 탄은 그 보편화에 큰 몫을 한 인물이다. 원래 엔지니어였던 그는 명상을 통해 개인적인 변화를 경험한 후 스탠퍼드대 뇌과학자들과 심리학자, 선승들과 함께 현대인이 쉽게 할 수 있는 명상법을 개발했다. 그의 구글 명상프로그램은 직원들의 스트레스 관리에 효과적이었고 기업의 높은 생산성으로 이어졌다. 이후 구글뿐만 아니라 애플, 골드만삭스 등에서도 명상시간을 도입하였고 2017년 현재 미국 내 기업의 44%까지 확대되었다.
흔히 마음을 바다에 비유하곤 한다. 겉으로 보면 파도가 심하게 칠 때도 있고 잔물결이 일 때도 있지만, 높은 파도가 칠 때조차도 바다 깊은 곳은 아주 고요하다. 고요한 마음이 바로 마음의 기본 상태이다. 우리가 그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차드 맹 탄은 평온하고 청명한 마음을 되찾으면 자연스럽게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마음의 기본 상태를 행복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마음의 고요함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의 표면은 변화무쌍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표면이고 흘러가는 것이다.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다’라는 말처럼 우리의 감정 또한 잠깐 머물렀다 지나가버린다. 우리의 감정, 기분, 생각, 경험들을 모두 흘러가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불안을 마주하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