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를 비스듬히 받치고 있다
단 한 가지를 하지 않음으로써 삶의 몇 가지 불안을 피해갈 수 있다면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단연코, 그 한 가지는 사랑이라 할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불확실성 그 자체로 뛰어드는 일이 아니던가. 그래서 누군가는 사랑은 미친 짓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김없이 사랑에 빠진다. 갈팡질팡하는 것 같지만 이미 마음을 빼앗기고 난 후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섣불리 어리석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불안을 피하기 위해서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행복을 놓쳐버릴 테니까. 모두들 이런 이치를 진작 알고 있었던 것처럼 사랑하는 쪽을 택하며 살아간다.
다양한 사람만큼 다양한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주제만큼 풀기 어려운 것도 없는 듯하다. 하지만 가끔 우리의 모든 불안이 실은 사랑과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다면 많은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지식검색 사이트부터 라디오의 고민상담 코너까지 사랑 때문에 고민을 토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남의 일인 양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런 감정을 수없이 많이 느꼈다. 설레고 황홀한 기분은 어떤 식으로든 두려움을 동반했다.
연애를 하면서 기쁨이나 설렘과 같은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불안, 분노, 우울은 영 피하고 싶다. 그러나 삶의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할 때도 불안감에 압도되는 사람이 아닌, 불안감을 잘 다루는 사람이 건강한 사랑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 단시간에 최대한 많은 사람과 만나보는 게 목적이라면 모를까, 진실한 사랑을 오래도록 유지하고 싶을 때는 특히 그렇다. 행복과 기쁨만이 있는 사랑은 반쪽짜리 사랑이다. 현실의 연인이나 부부가 사랑을 지속하려고 할 때 불가피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모든 감정이 사랑의 일부다. 불편한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한다면 기쁨을 느낄 기회조차 잃어버릴 것이다.
처음 사랑에 빠지거나 사랑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는 좀처럼 차분함을 갖기 어렵다. 설렘이나 흥분감으로 들뜬 상태를 경험한다. 심리치료사들도 연애감정에 빠진 상태를 일종의 환각상태로 간주한다. 심리투사를 통해 왜곡을 일삼고, 이성보다는 감성이 지나치게 앞서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콩깍지에 씐 시기이다. 평온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런 기분을 다소 불편하게 느끼기도 한다. 고요한 일상에 변화가 왔으니 마음도 적응이 필요한 것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는 어떨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더 공고해지는 관계들이 분명히 있다. 사랑을 유지하게 하는 특별한 요인에 대해서는 독일의 심리치료 전문의 위르크 빌리가 진행한 설문을 통해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연애감정에 몰입하는 속도가 결혼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밝히기 위해 몇 가지 설문을 벌였다. 첫눈에 반한 사람들과, 서서히 빠져드는 사람들 중 어느 쪽이 오랜 관계를 유지하는지 확인했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 불꽃처럼 쉽게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둘 사이에 큰 차이는 없었다. 사랑의 만족도나 행복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사랑의 지속에 영향을 준다고 확인된 것이 있었다. 바로 ‘연민’이었다.
응답자 중 기혼자의 60%가 배우자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또한 연민을 품고 결혼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에서는 이혼율도 6%로 매우 낮았다. 연민은 사랑을 시작하는 지점에서는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지속성에는 영향을 주었다. 이 연구는 사랑이 시작될 때 느끼는 설렘과 흥분이 어떤 마음으로 변해가는 게 중요한지 생각하게 한다. 즉, 사랑을 지속시키는 데는 상대를 향한 마음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연민은 상대의 입장이 되어볼 때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상대로 인해 얻게 되는 것보다 상대의 아픔이나 슬픔을 내가 헤아려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연민을 품는다. 자신의 입장밖에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랑으로 포장되더라도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랑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관계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도, 반대로 먼지처럼 허무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세계에 빠져 허무한 결말을 맞은 인물이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개츠비이다. 해석에 따라서는 최고의 로맨티시스트라 불릴 수도 있는 개츠비이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인생은 파국으로 끝났다. 농사꾼의 아들이었던 그는 상류층 여성 데이지에게 빠졌고, 그녀를 얻기 위해 엄청난 부를 쌓고 으리으리한 집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자주 열었다. 맞은편 저택에 살고 있는 데이지가 찾아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부족함 없는 모습을 갖추었고, 생애 내내 데이지를 갖겠다는 하나의 목적으로 전력투구했지만, 결국 데이지를 얻지 못했다. 왜일까. 개츠비가 뼛속까지 재벌이 아니어서? 아니면 좋은 가문이 아니어서?
물론 데이지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 전체에서 그려지는 개츠비의 모습은 야망으로 가득 차 뭐든 소유하기 위해 불법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데이지에 대한 마음은 소유욕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쉽게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더 욕망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가 사랑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갖겠다는 야심, 그 이상으로는 해석하기 어렵다. 그것이 낭만이나 순애보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개츠비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누굴 위한 사랑이었냐고.
어떻게 보면 연애는 너무나 피곤한 일이고 때로는 불필요한 감정소모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 가늠할 수 없는 타인과 서로 유일한 관계가 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미스터리에 가깝다. 그런데 이 모든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무력함이다. 지진에 있어서는 예외라고 생각했던 우리나라도 2016년에 5.8 규모의 지진이 발생해 많은 사람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갑자기 왜 자연재해 이야기를 하느냐면, 대자연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말하기 위해서다. 쓰나미와 태풍, 대지진과 같은 대규모 자연재해는 예측도 어려울뿐더러 한번 발생하면 순식간에 수백, 수천 명의 인명피해를 일으킨다. 정계와 재계에서 많은 사람이 힘을 과시한다지만,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하나같이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국내에는 《팡세》라는 문학작품으로 잘 알려진 파스칼은 불안을 고찰한 철학자이다. 그는 종교전쟁이 끝나고 유럽이 안정기로 접어든 시기에 인간의 불안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는 인간에게 전 우주를 사유할 수 있는 위대함이 있지만, 유한한 존재이기에 불안을 안고 사는 것이 미약한 인간의 운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인간은 대자연 안에서 한 개의 갈대와 같이 가냘픈 존재’이기에 불안을 거두고 종교를 믿으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의 힘을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나약한 인간이여, 불안을 거두고 사랑을 믿으라.’
우리 스스로 완전하다면 과연 누군가를 갖고 싶어 했을까. 거대한 우주 앞에서 너무나 보잘것없고 미약하며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기대고, 또 누군가에게 어깨를 내어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정현종, <비스듬히>
우리가 사랑을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연약함이다. 대자연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회적 존재라서 타인의 평가나 인정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스스로 내 가치를 믿고 인정해주면 좋겠지만,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따돌림이 문제가 될 일도, 연예인들이 댓글에 상처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쉽게 영향을 받는 연약한 우리는 내가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나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나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 단 한 사람 ’만 있어도 웬만한 어려움은 잘 견디어낼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진정으로 충만한 사랑을 느낄 때 이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불안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한다. 인정받고 싶고, 어떤 어려운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고 싶기 때문이다. 스쳐 가는 많은 사람 사이에서 나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줄 단 한 사람과 함께하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성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의존적 대상선택’이라고 말했다. 아기가 젖을 주고 돌봄을 주는 엄마에게 의존하듯이, 우리는 생존에 필요한 사람을 알아보고 사랑하게 된다. 이는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좀처럼 불안을 놓기 힘든 불확실성의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만으로도 안식을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불안감이란 게 결국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란 걸 인정하게 된다. 그러니까 영혼이 불안한 우리 이제 얻으러 가자. 라일락 향기 속으로…
- 정혜윤,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