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 익숙한 세계를 헐어버려도 괜찮다
자라기 위해서 한바탕 아픔을 치러내는 시간이 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갓난아기들이 밤중에 칭얼대는 것이나, 사춘기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이 많아지는 것도 자라는 과정이었다. 외적・내적으로 급격한 성장을 위해 우리는 그 시기에 맞는 아픔을 견뎌왔다. 서른 즈음에 또 한 차례 성장통을 치르게 된다. 부모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시기인 이때는 독립이나 결혼을 통해 큰 변화를 겪는다.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평균 결혼연령도 높아졌다. 그러다 보니 청년들이 심리적・경제적으로 자립하는 시기도 자연스럽게 늦춰졌다. 이십 대 중반에도 여전히 부모님께 의존하는 청년들이 많다. 대학원 입학부서에서 교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지인은 입학지원서를 대신 제출하러 오는 어머니들을 종종 만난다고 한다. 입시 문의 전화를 해오는 부모도 많아졌다고 한다. 대학원 진학을 하려면 아무리 어려도 학부 4학년일 텐데 아직도 부모가 직접적으로 진로에 관여한다는 뜻이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의 관점에서라면 대학생은 발달단계상 성년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학생은 위의 경우처럼 부모로부터 경제적・심리적으로 실질적 독립을 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따라서 많은 국내 심리학 연구에서는 이 시기를 청소년후기로 보기도 한다. 완전한 성인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청소년후기에서 성인기에 접어들 때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부모와의 지지적이고 밀접한 관계 속에서 개인적인 정체감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를 ‘세 번째 개체화’라고 부른다. 학자들에 의하면 성인기에 들어서기까지 우리는 세 번의 개체화 과정을 거친다.
첫 번째 개체화 시기는 두 살 즈음이다. 이 시기의 유아들은 엄마와의 밀접한 유대관계가 점차 느슨해지고 자아를 확립한다. 엄마의 품에 안겨서 세상을 경험하던 아이는 자신의 두 발로 이곳저곳을 누비며 직접 만지고 맛볼 수 있다. 그러면서 아이는 자신의 힘을 깨닫는다. 첫 번째 독립의 과정이다. 이때의 자립심에는 외로움과 불안함이 겹쳐 있다. 그래서 아이를 이해해주는 부모의 태도가 무척 중요하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도 쌀통을 엎지른다든지 컵에 든 물을 쏟아보는 등의 일을 저지르기 전에 엄마를 한번 살핀다. 자신을 지지해주는 힘을 한번 확인하고 모험을 치르는 것이다. 이 시기에 부모는 아이에게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하지만 네가 필요로 할 때 우리는 언제나 너의 곁에 있어”라는 메시지를 준다. 지나치게 통제를 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방임을 한다면 적절한 안정감과 자립심이 확립되지 않는다. 독일의 심리전문가 우르술라 누버는 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한 안정감을 충분히 확보하느냐, 불안에 떨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강하게 매이느냐가 이 시기를 통해 결정된다고 설명한다.
두 번째 개체화는 사춘기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말처럼 이때는 감정이 격변하며 보다 과격한 모습으로 부모와 거리를 두게 된다. 많은 청소년은 부모가 원하지 않는 모습과 행동으로 자신의 독립심을 보여주기도 한다. 흔히 이를 ‘반항’이라고 표현하지만, 독립적인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인 것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부모와 단절되지 않은 관계 내에서 스스로 독립된 존재임을 경험하는 것이다. 부모가 나와 다른 존재인 것을 이해하면서 자기정체성을 확립한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개체화의 시기다. 이때는 심리뿐만이 아니라 결혼이나 경제적 자립, 분가를 통해 개체화가 이루어진다. 처음과 두 번째 개체화 단계는 이 세 번째 단계를 위해 매우 중요한 단계였다. 앞선 단계들을 별 탈 없이 건너왔다면 세 번째 개체화도 순조롭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요즘의 청년들에게 세 번째 개체화는 어려운 과제가 되고 있다.
세 번째 개체화가 순조롭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 입장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단순하다. 익숙한 것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애착관계를 형성한 대상이 부모다. 그 애착대상과 분리될 때는 불안감을 느낀다. 이것을 분리불안이라고 한다. 과도한 분리불안은 자립을 지연시키거나 포기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어떤 것이든 두려움과 혼란을 야기하는 변화보다는 머무르는 것이 훨씬 쉬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부모의 입장이다. 분리불안을 경험하는 것은 부모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그들이 느끼는 불안이 더 강렬할지도 모른다. 영화 <보이후드>에서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이 영화는 한 소년과 소년을 둘러싼 가족의 성장과정을 잔잔하게 담고 있다. 어느 날 주인공 메이슨이 대학생이 되면서 독립을 하기 위해 짐을 싼다. 들뜬 마음으로 짐을 싸는 메이슨과는 달리 엄마의 표정은 좋지 않다. 짐정리를 거들다가 결국 의자에 주저앉은 엄마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 네가 이렇게 신나서 갈 줄은 몰랐다. 이젠 내 인생 끝이야. 장례식만 남아 있지…. 난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엄마의 허망함과 상실감이 느껴져 한순간 울컥하게 만드는 대사였다. 부모에게도 자녀와의 분리라는 건 이렇게 갑작스럽고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분리불안은 자녀의 입장만이 아닌 부모의 경험까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발달심리학에서도 초기에는 자녀가 경험하는 분리불안의 측면만 연구했다. 그러다 1977년 원숭이들을 관찰하게 되면서 변화가 생긴다. 새끼로부터 떼어놓은 벵골산 어미원숭이들의 분리반응을 관찰한 것이다. 이때 분리시기 동안 어머니와 새끼 양쪽 모두 상호작용 능력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는 이전까지 아동의 불안심리에만 집중하던 것에서 양쪽 모두의 분리불안으로 초점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연구들을 통해 어머니의 높은 분리불안이 부모-자녀의 역기능적 관계에 기여해 아이의 개체화 과정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불안 때문에 아이의 응석을 지나치게 받아주고 자율성을 해칠 정도로 과잉보호 및 과잉염려를 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정신건강의학박사 레비 교수는 과도한 분리불안의 원인을 어머니의 양육 욕구로 설명한다. 양육과 애정을 주려는 욕구가 큰 어머니들은 아기가 자신의 접촉과 돌봄을 많이 필요로 한다고 해석하여 과도하게 밀착된 관계를 만들기 쉽다는 것이다. 즉, 어머니 자신의 욕구가 자녀의 성숙을 막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대작을 쓴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렸을 때 이미 이 같은 사실을 파악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씩씩하게 자라서 독립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의존적인 상태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루스트는 마치 간호사와 환자의 관계처럼, 엄마에게 의존하고 보호받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어른이 된 우리는 때때로 부모님의 불안을 알아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강해 보이던 부모님이 어느 순간 참으로 연약해 보이고, 우리가 보호해야 할 존재로 생각되는 때가 있다. 부모님이 서로 보호하고 위로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안심할 수 있겠지만 한쪽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 볼 때는 더욱 불안하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독립이 그들에게 상실감을 안겨드릴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도 개체화를 차마 시도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개체화가 그렇듯이 세 번째 개체화도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체화(individuation)는 원래 ‘분리-개별화(separation-individuation)’라는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완전한 분리가 아닌 연결과 분리의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 일부 연구자들이 ‘개체화’라는 용어로 변경했다. 즉, 단절이 아니라 부모와의 지지적이고 밀접한 관계 속에서 개체감을 확립하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는 부모님에게서 완전히 떨어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려운 과제이지만 양쪽 모두에게 성숙의 발판이 되는 과정이다. 그것이 우선시될 때 비로소 배우자와 건강한 관계도 맺을 수 있다. 나아가 자녀였던 우리가 부모가 될 만큼 충분히 성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과정이기에 그 안에서 느낀 불안은 이유 있는 성장통이 된다.
어린 시절 우리에게 부모님은 유일한 세상이었다. 그 세상 안에서 믿고 사랑하며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이 믿던 세계가 한 번은 무너질 필요가 있다. 그로 인해 새로운 세계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립, 또는 앞으로 더 긴 시간을 함께 꾸려갈 배우자와의 세계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익숙했던 평화로운 세계를 한번 헐어버리는 것도 괜찮다. 마치 어렸을 때 엄마의 품에서 나와 두 발로 걸으며 자신의 힘을 깨달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