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령 Jul 20. 2016

나이듦의 아름다움

젊음보다 더 빛나는.

  이제 고작 서른을 넘긴 주제에 나이듦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좀 무례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퇴근길 내내 '나이듦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였으니 이에 대해 끄적거리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회사 옆자리에 앉은 후배가 이뻤다. 그렇지 않아도 회사에서 간혹가다 마주치면 참 이쁘구나 생각했었는데, 오늘 하루 그 아이의 옆자리에서 일을 하게되어 대화도 오래나눌 수 있었다. 그 아이의 이쁨이 연예인처럼 이뻐서 이쁜 것보다는 젊음에서 나오는 생기발랄함이 이쁨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그 아이와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어리다! 젊다!'라는 느낌이 확 와닿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기껏해봐야 나보다 다섯살 여섯살정도 어릴까.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입사한지 1~2년이 되었다고 했으니 그쯤일 것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지. 여하튼 20대 중후반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보다 약간 젊음'일뿐인 그 젊음이 왜이리 부러워졌던 걸까. 회사동기에게 대뜸 나는 저나이때 어땠느냐고. 나 입사하고 처음 만났을 때 어때보였느냐고  물었다. (우울해보였다고 할까봐 두려웠다.)

"언니?(그녀는 나보다 어리다.) 언니는 그냥 첨부터 순자(가명)언니 같았어. 그냥 김순자처럼 생겼었어. 지금과 같아."  라고 그녀는 답했다.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냥 나같아 보인다는 말. 썩 기분이 좋았고 그때와 지금이 같다는 말은 해석에 따라서 아직 젊어보인다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물론 그 당시에 노안이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렴.)

 나는 왜 후배의 젊음을 부러워할까? 아니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고 어린 것이 '미'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걸까. 그런 사회적풍조가 나또한 젊음을 더 가치로운 것으로 판단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남편에게 종종 '나 할머니 되어도 지금처럼 이뻐해줄거야?'라고 묻곤 한다. 꼭 '이뻐해줄거야'가 아니어도 어쨌든 그에게 하는 많은 질문들에 '나 할머니 되어도 ~~~~할거야?' 라는 숙어가 많이 사용된다. 나는 뭐가 불안해서 이런 질문들을 하게되는 것일까. 아마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들으면 통탄할 일이다. 내가 그렇게 못나보였냐며 말이다.(물론, 아니에요 할머니..) 하지만 나의 질문들 속에는, 마치 할머니가 되고나면  '아름다움'의 99%가  소멸할 것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단지 내가 나이가 드는 것만으로 못나지는 것이라면 그건 너무나 우스운 일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만큼 즉, 나이드는 것만큼 자명한 사실도 없는데 나의 하루하루는 못난이를 향한 길이란 말인가. 그리고 정말 할머니들은 젊은이들에 비해 못났다는 말인가? 그것도 말이되지 않는다. 내 기억에 나의 친할머니, 외할머니는 정말 멋진분이셨으며(대단한 업적을 남기신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자면 한두가지로 요약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친할머니는 그 시대에 흔히 가질 수밖에 없는 남녀차별적 사고가 전혀 없으셨고, 오빠와 나를 똑같이 아껴주셨다. 돌아가시기 몇년전에는  1년에 서너번밖에 못뵐 때도 있었지만 늘 반가워해주셨고, 글자를 배우지 못한 분이셔서 내 이름도 틀리게 쓰셨지만 나에게 용돈을 주실 때 봉투에 이름을 써서 주시기도 하셨다. 글씨가 이쁘진 않았지만 정성스럽게 써주신 내 이름에 나는 마음이 따뜻해졌었다. 외할머니는 허리가 많이 불편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갈 때면 오랜시간을 부엌에서 보내시며 항상 맛있는 찌개와 반찬을 해주셨고, 늘 내가 따뜻하게 잘 수 있도록 보살펴 주셨다. 물론 외모는 주름살도 많고 거뭇한 반점도 많고 에스라인은 찾아볼 수도 없었겠지만, 누가 우리 할머니들을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 모두 젊음을 이미 가지셨던 분들 아니던가.

 그리고 5년전에 돌아가신 작가 박완서 선생님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것처럼(돌아가실 때 80대 였던 걸로 기억함) 아주 순수한 미소를 가지신 아름다운 분이셨다. 아름다운 시를 쓰시는 이해인 수녀님 또한 그녀 자신의 아름다움을 전혀 잃지 않으셨을뿐더러 오히려 그 아름다움이 최근에 더 깊어지신 것 같다. (최근에 뉴스룸에 나오신 영상을 보았다.)

소녀같은 미소를 지닌 박완서 작가

 젊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생기발랄함이나 외모적인 '미'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눈에 한번에 들어오는 것이며, 그렇게 돋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갖고 싶어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이들어야만 아름다울 수 있는 부분 또한 분명히 있다. 나이듦이 가져오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 것은 좀더 '개인'에 달린 부분인 것 같다. 즉, 자연스럽게 생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와 관련된 아름다움인 것 같다. 그래서 어른들이 화장한 청소년들에게 '너넨 젊은 그자체로 이뻐! 화장안해두 돼'라고 하는 것과 다르게, 나이가 들었을 때는 나이듦 그자체로 사람들이 아름답게 봐주지는 않는듯 하다. 할머니가 되면 화장을 해야 이쁘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얼마나 진실되게 살았고 어떻게 자신을 정성스럽게 가꾸었으며, 또한 주위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며 살고 있는지와 관련된 것일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경험을 통해 피워낸 지혜와 관련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이듦의 아름다움은 좀 더 고차원적이면서 저마다 소유한 그 것이 대체불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나는 그런 나이듦의 아름다움을 가져보지 못해서 추상적으로만 생각해낼 뿐이지만, 내가 만난 아름다운 어른들을 떠올려 보면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듯 하다. 그래서 나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지금보다 더 아름다워질 수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시인으로 더 유명하신 이해인 수녀님

주름살이 늘어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쳐도, 나의 정신은 더 빛나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