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기대고, 기대하는 관계는 위험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그레고르 잠자. 꼬박 5년은 더 일해야 갚을 수 있는 아버지의 빚과 더불어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그에게 생활비를 의존하고 있다. 새벽 다섯 시면 기차를 타고 출근해야 하는 이 고달픈 세일즈맨은 어느 날 아침, 자신이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했음을 발견한다. 줄곧 그레고르의 노동력으로 안정이 유지되어왔던 가족들은 당황한다. 벌레로 변한 와중에도 가족의 생활비와 특히 여동생의 학비를 걱정하는 그와는 달리 가족들은 그의 혐오스러운 모습에 기겁할 뿐이다. 평소 애착이 깊었던 여동생도 처음에는 연민으로 돌보아주었지만 점점 지쳐간다. 경제력이라는 기능을 잃은 이 남자는 가족의 냉대 속에서 병들어가고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다.
실존주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변신>의 내용이다. 벌레로 변하는 비현실적인 설정 속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가족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생활비를 버는 동안은 그의 기능과 존재가 인정되지만 흉측한 벌레가 된 후에는 소통마저 단절되어버린다. 가족들의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진다. 우리가 보통 ‘화목함’이나 ‘따뜻함’으로 포장하려 하는 가족의 모습과는 다르다. 아마 그런 가족이었다면 그레고르를 끝까지 돌보고 그 따뜻함으로 말미암아 그레고르는 다시 인간의 모습을 되찾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감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족들의 태도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가? 현대에는 이런 안타깝고 씁쓸한 가족의 자화상이 다양한 모습으로 숨어 있다.
개인이 페르소나라는 일종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가족 또한 그러하다. 여기서 가면이란 우리가 흔히 가족이라는 단어에 부여하는 이상적인 이미지다. 화목함, 따뜻함, 안정됨, 푸근함과 같은 것들. 드라마나 영화 등 여러 매체에서는 실제로 이러한 이미지를 중심으로 대중의 감동을 끌어낸다. 나 또한 감동에 약한 사람이지만 가끔은 마음이 불편하다. 보편적이라고 전제하는 가족의 이미지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드라마에서 가족의 스토리가 이른바 ‘막장’일수록 시청률은 수직상승한다. 막장스토리가 우리 현실의 가족을 어느 정도 반영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물론 많은 가정이 제 역할을 건강하게 해내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건강하고 따뜻한 가정을 ‘보편적인’ 가정이라고 통째로 판단하기에는, 우리네 가정사가 너무나 다양하고 개별적이다. 앞서 말한 카프카의 소설뿐만 아니라 많은 문학 작품에서는 이러한 개별성을 다루려는 시도가 계속되어왔다. 위대한 소설가 톨스토이는 쉰 살 무렵에 완성한《안나 카레니나》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모두 제각각이다.
어쩌면 ‘화목한 가정’이라는 환상이 ‘우리 가족은 화목해야만 해’ ‘행복해 보여야만 해’라는 강박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상담심리전문가 한기연 박사는 《나는 더 이상 당신의 가족이 아니다》라는 책에서 이 같은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실제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 자체보다 ‘환상 속의 가족’과 자신의 가족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데서 생기는 심리적 문제가 크다는 것이다. 환상 속의 가족에 비해 부족한 내 가족의 모습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완벽하지 않은 가족 속의 나 자신이 수치스러운 존재라고 인식한다. 한 박사는 부모란 언제나 희생적이고 형제들은 언제나 양보하며 가족은 그저 바라만 봐도 행복한 존재라는 ‘가족신화’에 빠져선 안 된다고 경고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는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확신이 되어버린 관념을 뜻한다. 우리가 가족신화에 갇혀 있지 않고 복잡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발휘할 때 비로소 문제에 대처할 힘이 생길 것이다.
가족신화로 인해 흔히 겪게 되는 문제의 중심에 ‘기대’가 있다. 가족 간의 기대는 암묵적으로 나타날 때조차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의무와 책임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 기대를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많은 것을 억압하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는 그것이 당연히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자녀들의 학원비부터 비싼 운동화를 사줄 돈을 벌어 오느라, 정작 가족들과는 함께할 시간이 적은 아버지도 그런 삶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뿐인가. 성인이 된 자식들이 부모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무리하게 노력하는 경우도 많다. 당연히 제 몫이라고 여기며 책임을 다하는 이상으로 자신에게 거는 가족들의 기대는 차마 뿌리칠 수 없는 무거운 짐이다. 그래서 ‘나 하나만 참으면, 우리 가족이 평화로운 모습을 유지할 텐데’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 짐을 짊어지고 간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도 가족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자신의 의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새벽마다 힘겨운 출근길을 감내했다. 아버지의 빚도, 여동생의 학비도 당연히 제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능력을 잃게 되자 부모와 여동생은 모두 경제활동에 뛰어들었다. 진작에 가족들이 나눠 졌어야 할 짐을 그 혼자 짊어져왔던 것이다. 가족 간의 과도한 기대는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기가 쉽지 않아서 대부분 묵묵히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래서 그 기대를 받는 사람은 이것이 자신을 무리하게 가두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매여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기대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결국 자신이 지칠 때쯤에야 그것이 일종의 폭력이었음을 깨닫는다. 가족문제를 연구해온 임상심리학자 토니 험프리스는 희생을 요구하는 조건적 사랑이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불행으로 뒤틀린 가족상의 전형은 바로 가족이라는 관계를 인정해주는 대가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의 사랑은 조건적이다.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자리를 인정받고, 가족으로서 사랑받으려면 일정한 조건에 부합해야 한다. 물론 그 조건을 설정하는 사람은 대개 부모다.
_토니 험프리스,《가족의 심리학》중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비극이 될 정도로 지나치게 기대하고, 또 그 기대에 맞추려고 무리하면서까지 애쓰는 걸까. 왜 그레고르는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아버지의 빚과 여동생의 학비가 모두 제 몫이라고 받아들였을까. 과도한 기대를 받아들이면서까지 무거운 짐을 지려 하는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가족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자녀나 형제, 때로는 부모를 자기 자신처럼 여기는 것이다. 물론 가족을 다른 관계보다 심리적으로 더 가깝게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항상 문제는 ‘지나친 것’에서 발생한다. 타인과 지나치게 유착된 상태는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타인을 위해 희생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가족에 너무 밀착된 정서나 심리를 조금은 분리할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 느끼는 의무감, 채무감, 책임감과 별개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모든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나서 ‘네 멋대로 하라’는 뜻은 아니다. 자신을 살펴보고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 그러면 가족의 문제 중 어떤 것에 마음을 쏟고 어떤 것에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는지 판단할 수 있다.
건강한 가족관계는 건강한 개인에서 나온다. 가족에게 매여 ‘헌신’ 혹은 ‘책임감’이라는 이름 아래 나의 상처나 고갈된 에너지를 돌보지 못한다면 결국 다른 가족원에게 화살이 갈 수밖에 없다. 가족은 하나의 시스템이다. 구성원끼리 복합적인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쪽만 삐걱거려도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가족문제는 그 어떤 문제보다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복합적인 데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탓이다. 회사는 그만두면 그뿐이고, 충돌이 많은 친구와 애인도 안 보면 그뿐이지만 가족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자신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험프리스 또한 행복한 가족관계를 위한 조언으로 자신의 욕구를 아는 것을 꼽으며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족의 1차적 기능은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개개인의 잠재적인 소질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뒷받침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따뜻한 감동을 만들어내려다가 현실을 무시해버리는 가족드라마보다는 지혜로운 시선으로 자아와 가족의 균형을 맞추어나가는 <인생극장>이 필요하다. 그 균형을 유지하는 지혜가 발휘될 때 ‘화목한 가족이라는 환상’ 때문에 상처받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