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라는 지옥, 또는 거울
어떤 것들은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편이 나을 때가 있다. 이문세의 노래 <옛사랑>에 나오는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라는 노랫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눈치 없는 인터넷은 모든 것을 자판기처럼 뚝딱 알려준다. 가끔은 필요 이상의 정보까지 알려주는 게 요즘의 온라인 세계다. 30~40년 전만 해도 불가능했던 일들이 지금은 쉽게 이루어진다. 멀리 있는 사람과도 쉽게 연결되고, 타인이 어떻게 사는지를 들여다볼 수도 있다. 반대로, 불특정다수에게 내가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여러모로 편리해졌지만 뭔가 잃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디지털 강국에 살면서 타인들과 더 많이 소통하는 우리가 행복지수에서는 하위권을 차지한다. 왜일까. 행복연구가인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문화적 측면을 지적했다. 한국,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신흥경제국들은 소득수준이 높지만 행복감이 낮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문화적 성격이 집단주의다. 개인주의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개인의 자유와 정체성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그와 대립되는 개념이 집단주의다. 집단의 기준과 정체성 혹은 의무에 더욱 무게를 둔, 일종의 문화적 가치지향성을 이르는 말이다. 한국은 집단주의 지향성이 강한 만큼 ‘타인의 시선’이 가지는 영향력도 더 크다. 서 교수는 한국 사람들에게 집단의 평가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긴장감이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집단의 평가를 늘 의식해야 하는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경제적 수준이나 복지 수준이 올라도 행복지수는 꿈쩍도 않는다.
그는 저서 《행복의 기원 》 에서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예시를 든다. 한국의 운동선수들이나 연예인들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인터뷰에서 흔히 “열심히 할 테니 지켜봐주세요.” “잘 살 테니 지켜봐주세요”라고 말한다. 물론 상투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결혼과 같은 개인적인 대소사에 대해서도 ‘지켜봐달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고, 이러한 타인중심적인 생각은 행복 성취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온라인 공간에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참 많다. 여행 사진, 데이트 사진부터 시작해서 맛집 사진, 선물 인증샷 등등 사진 속 사람들은 다들 행복해 보인다. 행복지수가 바닥이라는 통계자료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이렇게 즐거운 사람들이 많은 나라인데 ‘헬조선’이라니. 모바일메신저의 프로필을 포함하여 SNS와 같은 공간은 타인에게 개방되는 곳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전제하고 사진과 글을 올린다. 따라서 자신만의 검열을 거칠 수밖에 없다. 무엇이든 간에 그 사람의 일부만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이 타인의 전체인 양 여기면서 자신과 비교하거나, 혹은 타인들이 자신의 사진이나 글을 ‘자신 전체’로 봐줄 것이라 판단하는 함정에 빠지곤 한다. 전자의 징후는 열등감이나 우울로 나타나고 후자의 징후는 자아정체성 혼란으로 나타난다. 핵심은 타자와 자신을 비교하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함몰되는 문제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우리가 타인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타인의 양면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모바일 메신저나 SNS를 하는 것은 일종의 즐거움이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립되기보다는 타인과 소통하기를 좋아하고 또 관심을 주고받고 싶어 한다. 분명히 타인을 통해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그 안에서 악성댓글을 통해 고통받거나 평가에 대한 불안을 느끼거나 타인과 비교하며 우울해지는 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즉, 타인 혹은 타인의 시선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그렇다면 타인은 과연 내게 어떤 존재란 말인가?
철학자 사르트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를 잡아먹을 듯한 이 시선들 … 아! 당신들은 고작 두 명뿐이었는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웃는다.) 이것이 지옥이지. 전에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었지… 당신들도 기억하겠지. 유황, 장작더미, 쇠꼬챙이… 아! 다 쓸데없는 얘기야. 쇠꼬챙이 같은 것은 필요 없어.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야(L'enfer, c'est les autres).
-사르트르, 《출구없는 방》중에서
그는 희곡 작품 <출구 없는 방>을 통해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서로 일면식도 없던 세 사람이 죽음 이후 호텔방이라는 한 공간에 배정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호텔은 입구도 출구도 없고, 천장의 샹들리에는 꺼지지도 않는다. 세 사자 死者들은 고문자가 없는 지옥에 의아해한다. 하지만 이내 깨닫고 만다. 영원히 눈감을 수 없는 이곳, 타자의 시선만이 남은 이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서로의 시선 때문에 영원히 괴로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음을 안 것이다. 반항의 철학자로서 수많은 언론과 대중의 관심과 비판을 받았던 사르트르였기에 더더욱 타인의 시선을 지옥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바로 타인의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타자는 ‘나를 바라보는 자’로 정의되고 나의 세계를 훔쳐가고 나를 억압하는 ‘지옥’과 다름없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 존재하는 한 나는 주체가 아닌 평가받는 객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때때로 악마로서의 타인을 경험하곤 한다. 나를 평가하고 억압하며 감시하는 대상, 어떻게든 불안을 유발시키는 존재로서의 타자. 하지만 그런 타자가 전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린 분명히 누군가와 함께일 수밖에 없다. 지옥과 함께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정말로 지옥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른 의미로서의 타자를 찾아볼 필요도 있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타인을 악이 아닌 선으로 여기는 지혜를 발휘하고 싶어서다. 아마도 헤르만 헤세라면 타인을 지옥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황야의 이리》는 한 중년의 남자가 자아를 발견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주인공 하리 할러는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고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는 자신을 황야의 이리라고 표현한다. 반은 인간이면서 반은 늑대인, 또는 시민이지만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자살 충동으로 자신을 괴롭히며 방황하는 존재다. 하지만 《황야의 이리》는 삶의 다양성과 자아의 양극성을 긍정해가는 희망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50대 남자인 할러는 작가 헤르만 헤세가 자신을 투영한 인물로 짐작할 수 있다. 하리 할러는 헤르만 헤세와 머리글자가 같고, 작품을 집필할 당시 헤세의 나이도 50세였다. 불안과 불만 속에서 자아를 추구해가는 불완전한 인간상은 헤세 자신이 경험하는 자화상이다. 아마도 그는 현실에서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방도를 깨달은 듯하다. 그 과정 안에는 ‘타인과의 만남’이 있었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방황 속의 할러가 헤르미네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둘은 많은 대화를 주고받는데, 헤르미네는 하리할러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내가 당신 마음에 들고 당신에게 중요해진 건 내가 당신에게 일종의 거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내 내면에는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에게 답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요. 본래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상대를 위한 거울이어서 서로 답을 주고받고 서로 조응하는 거지요.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 중에서
할러는 헤르미네의 얼굴에서 한 소년의 얼굴을 보았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이 그에게 대답을 주고 신뢰를 불러일으켰다. 헤르미네는 자신이 할러에게 ‘거울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할러와 헤르미네의 관계만은 아니다. 타인과 관계 맺는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거울 같은 존재다. 타인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비추어주고, 나 또한 타인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역할을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타인과 마주해야 한다. ‘만남’을 통해서 내가 모르던 내 모습을 보고, ‘대화’ 안에서 나 자신에 대한 통찰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의 관심을 원하고 계속해서 누군가를 찾게 되는 이
유는 나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치는 진짜 나를 찾기 위해서다.
최근 자주 쓰이는 신조어 중에 ‘케미’라는 단어가 있다. 영어 단어 ‘chemistry(케미스트리)’를 줄여서 쓰는 말이다. 화학적 성질을 뜻하는 이 단어는 사람 사이의 화학작용, 즉 나와 타인이 만났을 때 빚어내는 변화, 또는 어울림을 의미한다. 내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발현되는 내 모습도 다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이런 면이 있었나?’ 하고 놀랐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와 타인의 만남이다. 만남 안에서 우리는 너와 나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라는 관계를 형성한다. 그 관계 안에서 나에 대한 진실을 찾아간다. 그리고 바라게 된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일 수 있기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다시 말해서, 내가 더 좋은 사람일 수 있게 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란다. 할러가 결국에 삶을 긍정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헤르미네의 얼굴에서 자신의 진실을 볼 수 있었다.
지옥이 아닌 거울로서 타인과 조응하기 위해서는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자기확신이다. 이것은 기준이 내 안에 있을 때에 가능하다. 기준이 내 안에 있지 않고 내가 소유한 물건이나 직업, 인맥 같은 외부에 있다고 믿는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외부에 의해 계속해서 휩쓸리고 흔들릴 것이다. 작가 박웅현은 저서 《여덟 단어》에서 자신의 기준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는 것을 ‘자존’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는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한국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우리 스스로 자존을 놓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기준점을 바깥에 찍는다면 자신의 모든 선택지에서 정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무얼 보아야 하는지, 내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다른지 고민하는 데서 자신만의 무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청년들에게 남의 답이 아닌 나의 답을 찾으라면서 한마디를 남긴다. “Be Yourself !”
거울로서의 타인을 경험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타인과 마주하는 것을 보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타인과 나의 화학작용은 물리적 만남에서 일어난다.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눈을 보고 대화하는 일에서 소통이 일어난다. 온라인에서만 소통을 한다면 피상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눈빛을 주고받고 육성을 주고받는 직접적인 만남으로써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렇기에 오랜 친구도 굳이 시간을 내어 만나고, 소중한 인연을 만나기 위해 먼 거리를 달려간다. 만남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소통만큼은 온라인 세계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재택근무가 아무리 보편화되더라도 재택관계는 유효하지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밀하고 진실된 관계 안에서만 공유할 수 있는 공감과 위로는 팔로잉·팔로워의 관계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타인은 지옥일 수도, 거울일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타인 없이는 자신도 없다. 살아 있는 한, 혹은 <출구 없는 방>에서처럼 사자가 되어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와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계속해서 거울을 갖다 대며 나에게 영향을 준다. 타인을 지옥이라 말하는 사르트르 또한 타자의 이러한 성격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비록 누군가에 의해 평가받는다는 압박감은 불안으로 작용하지만 내가 나에 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나에 대한 어떤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이처럼 내가 타인을 거쳐야만 합니다. 타인은 나의 실존에 필수적이며, 내가 나에 대해 갖게 되는 앎에도 마찬가지로 필수적입니다.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