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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장_오도 가도 못하게 발목을 붙드는,

대명사와 관계와 기억 그리고 오은 시인

오늘의 문장은 국어사전과 친한 오은 시인의 시집, 『없음의 대명사』(문학과지성사, 2023)에서 가져왔습니다.          

온다 간다 말없이 와서

오도 가도 못하게 발목을 붙드는,

손을 뻗으니 온데간데없는

_「그것」(37p) 전문


"거기에 있는 그것 좀 여기로 가져와라."

군대 비서실에 근무하며 사단장님이 사용하는 대명사를 알아듣기 위해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해야 했습니다. 못 알아들어도 잘리고, 잘못 알아들어도 잘리고, 비서실에서 잘리면 최대한 고생하는 부대나 보직으로 가기 때문에 '거기'와 '그것'과 '여기'가 어딘지, 무엇인지 언제나 생각해야 했습니다.


대명사는, 말하는 사람은 정확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사용하나 듣는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의미로 들리는 것입니다. '친구의 친구' 같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거 같은 그런 두루뭉술함이 대명사에 있습니다.


대명사 같은 마음에, 실체가 없는 거 같은 것들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되고, 발목을 잡히게 됩니다. 어떤 것에는 발목을 좀 잡혀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떤 것에는 발목 좀 놓아달라고 사정하고 싶어집니다.


신기루 같은 그것이 있습니다. 희망과 절망일 수도 있고, 기쁨과 분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통장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숫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신기루 같은 것들, 허상에 가까운 것들이 우리 주변에 공기처럼 있습니다. 그것 말고 이것이요,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고, 그들은 있었습니다, 라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작년부턴 10월도 4월의 그날처럼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그날은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여전히 책임져야 하는 그들은 그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도 여전히 그곳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그저 그렇게 흘러가지 않도록, 기억을 이어가기.


일단 10월 초는 허수경입니다. 잊지 않으므로 이어가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라고 해도 이 마음이군요, 라고 답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요.

거기에 있는 당신도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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