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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장_오래된 사원

마음과 나무의 뿌리 그리고 이병률 시인

오늘의 문장은 모란을 공유한 이병률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 2005, 2판)에서 가져왔습니다.

나무뿌리가 사원을 감싸고 있다


무서운 기세로 사람 다니는 길마저 막았다


뿌리를 하나씩 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원의 벽돌이 하나씩 무너져내렸다


곧 뿌리 자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오래 걸려 나를 다 치우고 나면 무엇 먼저 무너져내릴

것인가


나는 그것이 두려워 여태 이 벽돌 한 장을 나에게 내려

놓지 못하고 있다


_ 「오래된 사원」 전문

2010년에 갔던 캄보디아가 생각났습니다. 단기 봉사 일정으로 갔던 터라 악어가 나온다는 강을 작은 배를 타고 건너기도 했고, 프놈펜에서 7시간을 달려 도착한 베이스캠프엔 전기나 수도 시설 따위가 없었었습니다. 스콜이 지나갈 때 머리에 샴푸를 조금만 묻히고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샤워를 했던 기억과 말도 안 되게 멋진 보랏빛 일몰의 풍경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관광으로 갔던 ‘앙코르와트’가 생각났습니다. 여러 명장면이 많았으나 왕이 떠난, 오래된 사원을 차지하겠다고 마음먹은 듯 사원을 감싼 나무의 뿌리들이 생각났습니다. 문득 그 나무의 뿌리를 보는 순간, 내 생애에 앙코르와트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 사원을 찬찬히 거닐었습니다.


작은 씨가 떨어졌을 겁니다. 아주 작은 씨가 뿌리를 내리고, 그렇게 왕궁을 차지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그런 작은 씨가 떨어지고, 자랍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차지합니다. 어떤 나무인지는 열매를 봐야 알 수도 있을 겁니다. 뿌리를 뽑으려 해도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들도 있어 삶이 무너져 내릴까 쉬이 결정하지 못합니다. 대개 이런 것들은 물을 주지 않아도 무럭무럭 무섭게도 자라납니다.


앙코르와트에 그 나무들이 없다고 생각하면 어딘가 허전할 거 같습니다. 제 마음에 자란 여러 나무들도 없다고 생각하면 허전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무엇을 없애는 데 시간을 사용하는 것보다 무엇을 가꾸고 다듬는 데 시간을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저도 자주 잊어서 무엇인가 자꾸 없애려다 마음의 손목이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시를 읽다 보면, 문득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 인생을 복기하게 됩니다.


문학동네 시집이 시인선 이전에도 많이 나왔다는 사실과 최하림, 마종기, 나희덕 선생님의 글이 더해진 30대의 이병률 시인의 시집이 참 좋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그나저나 등단하시고 첫 시집이 나오기까지 8년을 어떻게 견디셨나요?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합니다. 남쪽으로 갈까요, 북쪽으로 갈까요. 남쪽으로 가면 바다가 있고, 북쪽으로 가면 빙하가 있습니다.  


도서관은 토요일까지 휴관합니다.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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