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자 연대기
안녕하세요. 칭다오에 사는 이방인입니다.
일주일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이곳에서의 일주일은 단조롭지만, 작년 말부터는 폭풍이 몰아쳤던 거 같습니다.
'비자 연장 기간'이었거든요.
중국은 기본적으로 '영주권' 발급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2016년 7월 12일부터 필요에 따라 취업비자와 비즈니스 비자로 지내는 중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6년 동안 '시한부 삶'을 살아온 기분이 듭니다.
파견 나온 주재원들에게는 '비자 연장'은 어려운 걸림돌은 아닐 거예요. 회사에서 보통 알아서 해주거든요.
그런데 저와 같이 '법인'을 만들어서 자영업을 하거나 활동을 하는 분들은 이야기 달라집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하거나 대행사를 통해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비자'에 대해 이야기해야 될 거 같네요.
처음에는 칭다오에 정착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중국 윈난성 쿤밍이라는 지역 국제 학교 유치원에서 일하던 아내와 만나 쿤밍에 정착할 생각이었는데, 2년 정도는 칭다오에서 어학연수를 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제 선택이 아닌 본사의 결정이었기에 따랐습니다. 2년 동안 체류하려면 아무래도 '취업비자'가 유리할 거 같아 '태권도 인성교육 사범'으로 중국 칭다오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들어오기까지 복잡한 과정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2016년 7월 12일, 저와 아내는 캐리어 4개와 함께 칭다오에 도착했습니다. 결혼한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칭다오의 첫인상은 '낯섦과 익숙함의 공존'이었습니다. 한국 간판들과 중국 간판들이 섞여 있는 것이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첫 번째 비자는 '취업비자'였습니다. 태권도 도장에서 인성교육을 담당했습니다. 2016년은 저희 부부가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지금 헤어진 채로 1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이때 강해진 맷집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2016년 7월 16일, 저희를 초대한 선생님은 공동체를 하나 맡고 계셨는데, 갑자기 비자 연장 때문에 항저우에 가셔야 한다고 말하며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7월 23일, 전화가 한 통화 왔습니다. 자신이 비자 문제로 항저우에 거주하게 되었으니, 칭다오는 저에게 부탁한다는 내용의 전화였습니다. '어이없음'이란 네 글자가 가장 선명하게 생각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칭다오에 '발목'이 잡혔습니다. 책임져야 하는 단체까지 생긴 것이고요. 본사와 연락했지만, 본사 역시 사정이 어쩔 수 없으니 저에게 맡으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칭다오에 '억지로' 눌러 앉게 되었습니다(물론 지금은 들어오라고 해도 안 들어가고 버틸 만큼 칭다오를 사랑합니다).
그렇게 눌러앉게 된 칭다오에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습니다. 때마침 도장에 있다가 출입경 직원들이 와서 "넌 행정직인데, 왜 가르치고 있어?"라는 말과 함께 소환을 했고, 중국어 소통이 완벽한 아내와 가서 1시간 넘게 이야기를 들은 뒤에 여권을 빼앗겼습니다(외국인의 여권을 다른 나라 사람이 빼앗아갈 순 없으나 당시에는 C-공권력 앞에 한없이 작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도장에 피해를 줄 수 없어 고민하던 중에 외국인이 법인을 만드는 법이 개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장님과 상의한 끝에 회사를 설립하는 대로 이직하는 걸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 '청도경향문화전파유한공사'입니다. "살아 있으면 뭐라고 해야지."라는 말을 늘 품고 다녔습니다. 갑작스럽게 맡게 된 공동체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처음으로 '타의'가 아닌 '자의'로 칭다오에서 무언가 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설립'은 칭다오에서 '2047년'까지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외자법인으로 학원을 운영하거나 가르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태권도문화전파유한공사', '태권도관리용품유한공사' 따위의 이름을 사용합니다. 말하자면, 편법이죠. 한글학교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법인까지 생각은 안 했지만, 안전하게 거주하기 위해서는 '법인'이 필요 하단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청도경향문화전파유한공사'의 사업 범위는 전시부터 컨설팅과 행사 진행까지 문화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포함시켰습니다. 일정 금액을 주고 여권을 찾은 뒤, 회사 법인을 설립하고, 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도서관을 시작하게 되었고, 한국에 3개월에 한 번 정도 왕복하게 되면서, 3개월 체류 가능한 비즈니스 비자로 바꿨습니다. 발급받는 과정이 훨씬 간단했기 때문이고, 많은 교민들이 이 비자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에 이 비자가 단절의 시작점이 될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평범한 일상들이 저물고 코로나19라는 작은 바이러스가 세상을 삼켜갈 무렵인 2020년 3월 18일, 저와 아내는 형님 결혼식 참석차, 그리고 4년 만에 임신을 한 아내 건강검진 차 한국에 잠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3월 28일 국경은 봉쇄되었습니다. 살면서 국경이 봉쇄될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해 한동안 멍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으면 뭐라고 해야지."라는 마음의 울림이 저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계속해서 책방을 찾아다니며, 여러 기획들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저는 우연히 발견한 요로결석 수술을 세 번이나 받게 되었고(2cm나 되는 돌이 요관을 막아서 급성신부전증이 왔습니다),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1년 동안 중국에 있는 집과 도서관의 임대료 등 고정 비용은 계속 나가고 있었고, 아내와 저는 재정적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음을 깨달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2021년 3월 19일 만 1년 만에 저 혼자 칭다오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비자 대행사에서 아내와 아이 비자도 쉽게 나올 거라는 말을 듣고 홀로 복귀했습니다. 돌아오니 바뀐 게 많았습니다. 비자 정책도 까다로워졌고, 격리 마치고 거류증이 안 나와서 돌아가는 사람도 보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제 비자는 나왔지만, 동반 비자는 언제나 오냐고 대행사에 문의했더니 대뜸 "아, 그거 여기 오면 나올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요."라고 하더군요. 정말 '명치타'라는 말이 생각났지만, 언제나 타국에선 한없이 작아지죠. 제 비자는 1년이 아닌 6개월이 나왔고, 그 6개월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도서관 이전 등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미크론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비자 조건은 더 까다로워져서 1인 비영리 법인에도 무역회사 급 매출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비를 다 털어서 결국 간신히 조건을 비슷하게 맞춰 이번에도 6개월 비자가 나왔습니다.
이번에 비자를 신청하는데, 출입경 직원이 "한 달에 10만 원(한화 1,800만 원)도 못 버냐?"라고 했습니다. 속에서 욕이 한 바가지로 나왔지만, 저는 최대한 비굴하게 죄송하다고, 간사하게 아부를 떨며, 비참하게 연장만 해주면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겠다고 부탁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지 이제 10개월이 지났네요. 뒤집기를 하던 아들은 이제 걷습니다. 아내는 독박 육아에 지칠 대로 지쳤지만, 엄마 파워로 버티고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제 비자 연장은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기에, 저는 비참함의 끝을 찍었습니다. 결과는 6개월 연장, 다른 분은 저희보다 조건이 좋은데 3개월 연장. 기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비자가 나온 것에 감사하는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비자 연대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동반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 동사무소에 해당하는 '가도'라는 곳에 걸려있거든요. 요구한 자료를 채워야 합니다. 현재 개인 소득세와 외자법인은 무조건 중국 직원 한 명을 둬야 해서 그 직원 사회보험까지 꼬박꼬박 내고 있는 중인데, 이제 기억 납세(마이너스인데도 불구하고)를 채우라고 합니다. 까라면 까야 하는 경계인의 삶이 참 고달프죠. 고달픔이 모이면 제법 달달한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아내와 아들이 참 그립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 마음껏 보는 날이 오길 바랄 뿐입니다. 가수 윤종신이 가족을 두고 긴 여행을 떠나며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리움도 느껴 봐야 소중함을 알죠." 가족은 당연함이 아니라 소중함이란 사실을 여실히 깨닫는 중입니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났을 때,
당신도 그리운 누군가와 떨어져 있는 상황인가요? 억지로 참지 말고, 그저 마음껏 그리워하시길, 마음껏 눈물로 흘리시길 바랄게요. 지금은 울어도 창피하지 않은 시절이잖아요.
언제나 어디에서나 무사하길 바랍니다.
2022년 1월 11일 화요일
칭다오에 사는 이방인 드림.
#칭다오 #해외생활 #중국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