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오늘의 문장_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마음이 마음으로 흐르는 느낌이 좋아_주민현 2023.09.07.

오늘의 문장은 칭다오까지 와닿은 주민현 시인의 시집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창비, 2023)에서 가져왔습니다.


종이컵에 커피가 말라붙은 모양

지진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세상을 바꾸는 건

작고 미세한 균열, 균열들


우리는 파편적이고 어긋난 말들을 모아

우리의 언어로 말하네


1500년대에는

머리 긴 여자들이 모두 마녀라 불렸대


마녀의 이야기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어서

모두 매장되었지


그럼 나는 귀신같이

설명되지 않을 만큼 긴 머리를 하고

발목까지 오는 붉은 옷을 입고 걸어갈 거야


세상은 계속 복잡하고 어지러울 거란다

그렇다고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란다


아이에게 말해주는 할머니가 되어

따뜻한 양파 수프를 먹을 것이다


커다란 나무가 있던 자리의 텅 빈

느낌


지진이 갈라놓은 땅 위에 텐트를 치고


양궁 선수와 테니스 선수의

머리카락 길이와 여성스러운 복장에 대하여


다루는 뉴스를 본다


머리카락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양파, 동그란 두상

양파, 숏컷의 역사

양파, 위로 자라나는 싹


겹겹이 포개지는 얼굴들같이


넓어지는 세계 속으로

뭉근하게 다이빙하면


좋은 양파란

무르지 않고 껍질이 바삭거리며 선명한 것


그건 마치 좋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들려서

나는 좋은 양파가 되고 싶다


그럴 때 양파는

자신을 껴안은 모양새로 발굴된 사람의 뼈


마트를 지나 체육공원에 도착하면

저마다 다른 복장을 하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버린 만두에서 개미들이 솟아오르고

발을 살짝 떼어보면


자꾸만 땅이 갈라지며

새로운 지형과 개체가 생겨나고 있다


돋보기를 땅바닥에 대고 들여다보면

이름 모를 벌레들이 계속 증식하고 있다


-「넓어지는 세계」 전문



시집을 읽는 내내 빙글빙글 미끄럼틀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가며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기분 좋은 변주, 소외된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 소외시키는 것들을 노려보는 시선, 모두 좋았습니다. 집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비일상이 되는 시기에 시인은 웃으면서 부조리들을 꼬집습니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시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이 시대에 문학과 시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게 됩니다. 아마도 비틀어 꼬집기가 아닐까, 시인의 시를 읽으며 생각하게 됩니다. 혼자서 문을 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문을 밀고 들어와야 하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나 하나 감당하기도 힘든 세상이지만, 작은 힘이 모이면 큰 위로가 될 거라 믿고 내일도 도서관 문을 활짝 열겠습니다.  


좋은 책 한 권이, 좋은 문장 하나가 어려운 시절 곁을 든든하게 지키는 친구가 되길 바랍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안온한 밤 보내세요.


내일 오전 10시에 뵙겠습니다.


#주민현시인 #멀리가는느낌이좋아 #오늘의문장 #인생 #방향 #속도 #칭다오 #칭다오청양 #칭다오경향도서관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의 문장_그러므로 사랑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