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숙성해서 먹어요
-
도서관에는 무거운 시집도 많다. 박연준 시인이 '읽어본다'시리즈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난다)에 기록한 글을 자주 되새겨 본다.
도망가고 싶다.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도망가는 것은 시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한 일을 보세요. 우리들이 한 일을 똑똑히 바라보세요, 라고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시. 이런 게 일류다. 사람들은 때로 일류를 불편해한다. 인정사정 봐주는 법이 없으니까.
_박연준, 장석주,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난다) 중에서
지난주에 한글학교 북클럽 어린이들과 영화 '동주'를 봤다. 어쩌면 시는 '부끄러움'을 '기꺼이'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시린이는 자연을 노래하는 시도 좋지만, 백무산 선생님 같은 분들의 묵직한 시도 좋다.
2021년 168번째 책
백무산,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비시선)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ㅡ「정지의 힘」 전문
권력이란 것은 언제나 견제가 필요하다. 견제하지 않으면 '폭주 기관차'가 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짧은 역사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폭주 기관차를 봤다. 언제나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렸다. 테두리라 하자.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는 우리에게 '건강한 사회'를 선물해 준다. 안전한 테두리가 생기고, 그 안에서 '해야 할 일'을 찾아가는 사회. '멈춤의 힘'이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곤 하지만, 언제나 '국민'이 '폭주 기관차'를 멈췄다.
“열 번째 시집이다. 여전히 나는 첫 시집을 내던 그곳과 다름없는 공간에 머물러 있다. 나 자신이 하나의 관측소인 셈이다.”
ㅡ「시인의 말」 중에서
시인은 80년대부터 계속 그 자리에 있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떠났나, 자연으로, 길가로, 각자의 생으로 떠나고 홀로 남은 거 같은 시인. 그들 중에선 개혁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그 대상이 되어버린 자들도 있기에 시인의 시는 외롭고, 슬프고, 오래된 세월로 인해 정제된 고요한 분노가 느껴진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올 필요 없답니다 민주화가 되었답니다
민주화되었으니 흔들지 말랍니다
민주 정부 되었으니 전화하지 말랍니다
민주화되었으니 개소리하지 말랍니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겨울비 온다
어깨에 머리에 찬비 내린다 배가 고파온다
이제 나도 저기 젖은 겨울나무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
ㅡ「겨울비」 중에서
이렇게 한심한 시절에도 겨울은 온다. 여전히 겨울이 무서운 이들이 있다. 열심히 올라가는 이유가 사다리를 걷어차기 위한 것이라면 그 생은 얼마나 가엽고 보잘것없는가.
한 생이 무용하고 무해한 것은 아름다움으로, 무용하고 유해한 것은 폐기물로 나뉜다.
무용하더라도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욕심이라면 욕심이다. 백무산 선생님의 시집을 제주 조천의 '시인의 집'에서 만났다. '친필 사인본'으로 가득한 곳에서 욕심내어 가져온 시집을 인제야 펼쳤다. 어떤 시집은 때를 기다리는 거 같다. 1년 4개월 숙성된 시집은 힘이 셌고, 불편함은 당연함으로 다가왔고, 지금 이 시절은 무척 한심하나 그 어느 때보다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시간이다. 3대 시집 전문 서점(개인적인 기준) 제주 '시인의 집'은 '책방 투어 명장면'이었다. 일산에는 책방 이듬이, 혜화동에는 wit n cynical이, 제주에는 '시인의 집'이 있다.
-
오전에는 시 낭독 모임 시발(诗发)이 모여서 시를 읽고 낭독하며 삶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은 김혜순 선생님의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 시인선)로 발화된 말의 꽃은 무거움이란 이름으로 피어나 '질문'이란 말로 지었다.
함께 나눈 시
김혜순,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 시인선)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열림원)
김원두, 『꽃이 되었다』(그림과책)
백무산,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비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