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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장_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여름 그리고 안희연 2023.09.12.

오늘의 문장은 여름 언덕의 등대지기 안희연 시인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창비, 2020)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자만이 문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 다 훔쳐가도 좋아
문을 조금 열어두고 살피는 습관
왜 어떤 시간은 돌이 되어 가라앉고 어떤 시간은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했다
한쪽 주머니엔 작열하는 태양을, 한쪽 주머니엔 장마를 담고 걸었다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을 구분하는 일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
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나의 과수원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
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

-「열과裂果」 전문

 

일찍 자려고 했건만, 그래도 얇은 시집을 가져왔건만, 어떤 시집은 마음의 구멍들을 파고든다는 사실을 잊었던 거 같습니다. 무엇이든 대상이 중요한 법인데,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직분 속에 나를 숨겨왔나, 혹은 헷갈렸나, 곰곰이 생각하며 읽어나갔습니다.


스페어처럼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오늘을 살아간'*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당신은 무엇을 담는 사람인가요? 물어오는 풍경 앞에서 나의 규모를'** 얼마나 지나치게 생각했는지,

'거울 속에는 그곳에 도착하지 않은 내가 있고

이곳의 나는 자꾸만 희미해져갑니다.***


나는 오직 나로 존재하지만은 않기에 수많은 나의 직분과 역할들이 내 안에서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 마음'****을 만듭니다.

이토록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간 시간이 지난 언덕은,

그러니까 그 많은 언덕들은, 나를 어떻게 견뎠을까? 되묻는 밤입니다.


깃털처럼 사라질 몸에 '너무 커다란 우리의 영혼'******을 담고

풍선처럼 부푼 꿈과 꿈이 터질까 걱정하는 마음의 무게를 발에 실어

언덕을 밟고 올라갔으니, 이제는 '뒤로 더 뒤로 가보기로'******, '멀리 더 멀리 가보기로'******, '영혼을 조망하기 위해'******


코로나 이후 어떤 바이러스가 인류를 덮칠까 걱정하던 지난 여름,

우리를 덮친 건, 바이러스가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구치소에서 한 달, 괴롭고 힘들어'라는 말을 14명의 사상자를 낸 피의자가 하고,

'내 아들 손이 친구 뺨에 맞았다'라는 말을 '가해 학부모'가 억울하다며 이야기하는,

그런 여름을 보내며, 홍수와 지진, 산불과 열대화를 보며,

나는, 그저 정상적인 일상 안에서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변수라고 불평하던 모든 것이 지난여름에 일어난 태풍 앞에 그저 태풍의 눈처럼 느껴지고,

이제는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 세상은 이 모양이 되었을까?'

누군가 미래에 지금 시절에 관해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거 같습니다.

"진보는 교만하고, 보수는 무식했고, 모두 욕심이 많았으며, 표리부동했다."


가을입니다.  


'그들은 어쩌다 인간으로 태어났을까요?

할아버지는 정성껏 다음 씨앗을 심으며 말했습니다
나도 인간의 모든 비극을
예측할 순 없었노라고'

_「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중에서


누군가에게 감사하게 된다면,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이 아닌,

책임질 수 있는 오늘 해야겠습니다.

일과 약속은 미루고 나면 언제나 더 곤란해졌습니다.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미래를 알 수 없는 인간의 최선.


시집 안에서 방황하다가 이렇게 출구를 만들며 나왔습니다.

시에 대한 오용과 오해는 시인이 모두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시는 결국 뱉으면 독자의 수만큼 다양한 이야기로 변할 테니까요.


내일 도서관은 오전 11시~오후 8시까지 개관합니다. 준서가 조금 아파서 금요일까진 자원봉사자님들에게 도서관을 온전히 맡기고, 저는 점심에 출근할 거 같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걱정은 이제 잠에게 넘겨요.


*「스페어」 중에서

**「나의 규모」 중에서

***「에프트」 중에서

****「가끔의 정원」 중에서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중에서

******「자이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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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까지 간 소중한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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