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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호 Nov 23. 2022

내 삶에 불편함이 없어지지만 사회에서 내가 없어지는

1년 넘는 재택근무가 나에게 준 것

아래는 2021년 5월에 쓴 글이다.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유행한지 1년이 넘도록 재택근무를 계속하던 시기였다. 처음에는 마냥 편하고 좋았던 재택근무는 내 안에 많은 생각을 바꿔놓았다.




어렸을 적 우리는 누구나
어른이 되었을 때의 자신을
상상해보지 않는가?


2021년 5월.


어렸을 적에 우리는 누구나 어른이 되었을 때의 자신을 상상해보지 않는가? 확실한 것은 내가 상상했던 30대의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내 모습이 어떻냐면, 누가 봐도 후줄근한 아저씨인 상태다. 머리카락은 전혀 정돈되지 않은 더벅머리. 당연히 씻지 않았다. 면도도 안했다. 허름한 후드티와 롱 패딩을 걸치고 점심을 먹으러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누가 봐도 지금의 내 모습은 '멋진 사회인'이 아니다.


매일 12시가 되면 점심 식사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보통 세 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1) 만들어 먹는다, (2) 시켜 먹는다, (3) 나가서 먹는다. 열심히 고민하다가 오늘은 바깥공기도 좀 마실 겸 나가서 먹어보기로 한다. 잠옷에 그냥 후드티 하나 걸치고 마스크를 쓴다. 머리가 지저분하니 캡 모자를 얹는다. 롱 패딩을 걸치니 추위 대비도 완벽하다. 밖이 좀 춥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발까지 제대로 신기엔 좀 귀찮아서 대충 슬리퍼를 신고 집 밖으로 나섰다.


후드와 모자를 대충 눌러쓰고 혼자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김밥천국으로 향했다. 오늘은 좀 특별한 걸 먹고 싶었지만, '뭘 먹지?' 하는 고민을 하면서 걷는 와중에 두 다리가 나를 여기로 데리고 왔다. 어쩔 수 없다, 이미 도착했으니. 사실 뭘 먹느냐가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일하는 중이니 간단하고 빠르면서 최소한의 맛만 있으면 된다.


"사장님, 등심 돈가스 하나 주세요."

"네 알겠어요. 오늘은 좀 일찍 왔네요?"

사장님은 이제 나를 익숙해하는 모양새다. 처음에는 동네 백수를 보는 눈으로 봤던 게 기억난다.


우적우적 돈가스를 씹고 있자니, 20대 초반 대학생이었던 나와 지금의 내가 뭐가 다른가 싶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돈가스를 치즈돈가스로 업그레이드하는데 드는 추가 비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도. 대학생 시절 나는, 10년 후 30대인 내가 후드티 입고 집 앞에서 돈가스를 먹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빛이 나는 아주 멋진 사회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돈가스는 아무 잘못이 없다. 항상 최고다.



나는 지금의 편한 삶을 자랑스러워하는가


1년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불편'한 일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 불편에는 출퇴근이 큰 역할을 했다. 어떤 옷을 입고 나가야 할지 전날 밤부터 생각해둬야 하는 것이 불편했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헐레벌떡 씻고 서둘러 집을 나서야 하는 것이 불편했다. 편도로 1시간 거리를 운전하는 것이 불편했고, 사무실을 여러 사람이 같이 이용한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재택근무를 하는 지금은 '불편'한 일은 거의 없다. 모든 일이 너무 편하고 합리적이다. 

옷을 갖춰 입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 세수를 하지 않아도 머리를 감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 내가 누워서 일하든 요가하면서 일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 편하고, 같은 공간을 쓰는 사람들이 없으니 무슨 생리현상이든 거리낌 없이 실행할 수 있다. 너무 편하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편한데, 나는 지금의 내 상태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의 내 모습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아주 자랑스러운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이윽고 모든 편리함을 갖추었는데 왜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불편하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 내가 속한 회사는 미국 회사고 내가 속한 팀의 팀원들은 모두 외국인이며 해외 거주자들이다. 그래서 팬데믹이 시작한 이후 우리는 왕래할 일이 없었고 만나지 못한 지 1년이 넘어간다. 솔직히 이제 이들이 게임 캐릭터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사실 이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NPC였어."  "아 어쩐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비단 연인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해외출장을 자주 오가야 했을 때는 비록 몸은 불편했지만 팀원들을 사람으로 느끼기는 했으니까.


어쩌면 '불편하다'는 것은 '타인과 교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사람과 좀 더 원만하게 소통하기 위해 이런저런 규칙/규범들을 만들어왔다. 내가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마주하고 있다는 것. 내가 어떤 규칙이나 프로토콜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사회적 조직에 속해있다는 것. 그래서 결국 나의 불편함이 많다는 것은 내가 소통의 장 한복판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팬데믹이 오기 전 사람들은 불편함들과 지독하게 싸워왔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우리가 아주 많은 소통을 하게 되면서 이런 불편함들이 켜켜이 쌓여 결국 우리의 숨통을 졸라왔기에 우리는 이 불편함 들을 최대한 들어내려 노력했다. 그런데 팬데믹과 재택근무는 이 모든 것들을 한번에 날려버리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재택근무는 우리에게 편한 환경을 안겨주지만 장기화되면 사회적 소속감을 빼앗아가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내가 어떤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지, 어떤 팀에 소속되어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하지만 하루 종일 기계와 대화하면서 긴장 없는 '나의 공간'에서 계속 생활하다 보니 내 몸은 소속감을 잃어버렸다.


재택근무를 시작한 뒤로 나의 생활은 활력이 없게 느껴진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내 몸은 사회적 교류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현재의 내가 멋지게 살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겠지. 나의 상황은 딱히 변하지 않았음에도.



그럼 재택근무를 하기 싫어?

그렇다고 내가 재택근무를 하기 싫으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이미 재택근무에 너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이제는 출퇴근하는 것이 두렵다. 교류가 없네 활력이 없네 하고 투덜거렸지만 사실은 이 편안함에 중독된 모양이다.


재택근무는 마약과 같습니다. 이게 되는구나, 진짜 가능하구나 깨닫는 순간 빠져나오기 힘들어요.





이렇게 사회에서 나는 없어지고 하루하루 내 방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방구석 히키코모리가 되는 것일까. 현재의 상황이 더욱 장기화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현상 유지를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불편함을 무릅쓰고라도 밖으로 다시 뛰쳐나가는 것을 선택해야 할까. 나도 앞으로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궁금해지고 있다.






2021년 5월의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저 때의 나는 일적인 면에서 사회적 교류가 상실된 것에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액션을 고민하고 있었다.

 

결론. 그래서 팬데믹이 종료되기 전 밖으로 뛰쳐 나왔다.

잘했다 1년 전의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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