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처음 탄 순간을 기억한다. 나를 잡아준 친구가 언제 손을 뗐는지도 모르고 앞으로 혼자 나아갔던 순간. 멀어지는 친구를 보면서도 페달을 밟고 달렸던 순간. 누군가 나를 놓아버렸는데도, 심지어 멀어지는데도, 기분 좋은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해방감. 자전거는 자유를 품고 있었다.
재활을 위해 내려간 도시의 눈에 띄는장점은 바로 자전거도로였다. 보통 다른 곳의자전거도로는 야바위처럼 도로가 있다없다 하는데, 이곳은 끊기지 않고 잘 정비되어있었다. 심지어1년동안 단돈 3만 원으로1시간 이내의 거리면 자전거무한이용이 가능했다. 이런 곳에서 자전거를 안 타면 어디서 탄단 말인가!'타슈'라는 공영자전거 이름처럼 정말 자전거를 타야만 할 것 같았다.생리하는 동안 수영을 하지 못해서 몸이 굳을까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생리통으로 심하게 앓아눕는 하루이틀을 빼고 수영을 하는 대신 자전거를 타는 것으로 대체해보기로 했다. 물론 50분 정도 타면 허리가 아파 다시 침대에 들어 누워야하지만 그건 수영도 마찬가지였고 허벅지 힘을 길러주는 대가라고 생각하면 됐다. '척추의 신' 정선근재활의학과 교수도 허리를 세우고 자전거를 타는 것은 좋은 운동이라고 하셨으니까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자전거를 탈 때 예상되는 장애물을 고려하여최대한 통증을 줄일 수 있는 계획을 세웠다.
허리 아픈 사람이 자전거를 탈 때 주의할 점은 어깨와 허리를 반듯하게 하는 것이다. 긴장하지 않으면 어느새 허리가 둥글게 말리면서 어깨가 올라가 승모근이 백두산처럼 높이 치솟아 있었다.평화로운 정경에 한눈팔기보다 자전거를 타는 내 모습에 신경을 써야 했다. 내 자세보다 더 중요한건 바로도로를 살피는 것이었다.불규칙함은 고통이다. 자전거 도로의 포장상태가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에게 그 충격이 전달된다.도로중간의 이음새, 횡단보도와 자전거 도로 사이는'쿵쿵존'이었고허리에는 최악의 장소였다.푹 패인 곳이 출현하면 슈퍼마리오가 점프하듯쿵쿵거릴 것 같은 위험 공간에서는엉덩이를 살짝 들어서 허리에 가해지는 충격을 최대한 완화해야 했다. 몇 번의 탐사를 거쳐허리가 감당할 수 있는 대미지를 측정하여도로의 상태가 양호하면서 풍경이 아름다운 적정한 루트를 찾았다.나무 그늘 아래로 자전거를 타고 갑천에 가는 길은 비단길이었다. 내가 누워 볼 수 있는 세상이라고는 영화 속에 펼쳐진 전쟁터, 창틀 안에 갇힌 하늘, 방 한 칸이 전부였다. 허리가 아파하지 못했던 일을 도장깨기 해나갈 때면, 누워있으면서 안으로 안으로 굽이쳐 가던 검은 물결과 대비되어, 더 강렬하게 벅차올랐다. 갑천은 계절마다 다른 빛깔을 번갈아 입으며 내 마음을 쓰다듬었다. 잘 버텼다.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소망을 돌탑에 쌓듯 정성 들여 페달을 돌렸다.
50분 자전거를 타기 위해 하루 종일 누워 있었고 자전거를 타고 와서 또 누워있는다. 그깟 자전거 타는 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차이가 컸다. 아파도 할 수 있는 것과 아예 못하는 것은 전혀 다른 단계이며 회복에 대한 희망을 조망하기도 한다.
도로를 자전거로 저어가며 나아갈 때, 내 몸은 멈춰있지만, 내 몸은 앞을 향해 나아간다. 귀, 목, 팔, 다리, 머리카락 사이로 시간과 바람이 빠져나간다. 돌아가는 바퀴 사이로 흐르는 길. 오르막, 내리막이 따로 없다.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에 따라 달리 보일 뿐이다. 결국 뒤돌아보면 길은 길이다.
눈을 감고 상상한다. 두 다리로 힘껏 페달을 돌릴 때 느껴지는 바람과 아무도 없는 꽃길을. 천천히 가면 꽃이 보이고 세게 달리면 바람이 보이는 자전거. 자전거 핸들에 닿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날, 그 길을 통과하여 드디어 자전거에 안착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와 허리가 아파 찜질을 하는 동안에도 내가 지나온 동선을 희미하게 그려보곤 웃었다. 들끓다가 사라지는 순간의 기쁨이 아니었다. 바람이 불면 언제든 피어오를 기억들이었다.
나아가다. 지금 이 순간,이만큼 나에게 중요한 단어는 없는 것 같다. 정체되지 않고 조금이라도 성장하기를 소망한다.
나아가지 못했다. 그저 실패했다고 절규하고 제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만이 나에게 있어 유일한 성장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나조차도 말할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마음이 닳아버린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으로 자전거, 수영, 영화가 스며들었다. 다리로 페달을 밟아 나아가는 자전거,물살을 가로질러 팔로 나아가는 수영, 두뇌를 이용해 정신을 고양하는 영화. 이 셋은 내게 겨우 얻어 낸 일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도약의 발판이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내가 아니라 계속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나, 내가 삶에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일 것이다. 한 뼘짜리 마스크 안에서도 숨을 쉬며 살아갔듯 한 칸짜리 방 안에서 희망을 주물럭거렸다. 자전거, 수영, 영화는 가엾은 삶에 희망찬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