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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몬스 Jul 22. 2022

누워서 보는 '캐스트 어웨이' (1)

이 영화 실화인가요?

# 집 안, 밤인지 낮인지도 모를 까만 방


지하철 역과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경기도 변두리 어느 동네 원룸 안, 침대에 표정 없는 얼굴로 누워있는 나. 밖에는 빗소리가 들린다. 창문, 길, 우산, 사람들의 신발, 낙엽, 세상의 온갖 것에 떨어지며 왔다비는 소리치고 있었다. 무언가 서서히 젖어갈 때 통증으로 찌푸려지는 이마 근육만을 건조하게 느꼈다. 다리가 살살 저려온다. 스멀스멀 기어내려가는 방사통 벌레들을 느끼며 오늘의 허리 상태를 가늠한다. 몸은 움직이지 않은 채 고개만 까닥 돌려 침대 옆 무선 마우스를 찾아 휙휙 돌린다. 절전모드의 컴퓨터가 켜지자 까만 방 안으로 하얀빛이 퍼진다. 인터넷 화면 속 영화 제목 클릭, 스크롤을 쭈욱 내렸다가, 다시 뒤로 버튼을 누르는 행위가 한참 반복된다. 그러다 머뭇대는 마우스. ‘무인도’라는 단어에 이끌려 ‘캐스트 어웨이’를 살펴본다. 고3 때 보다가 잠이 든지도 모르게 잠들었던 영화다. 그때와 느낌이 다르다.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일렁인다. 이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영화를 재생한다. 마우스 옆에 있던 블루투스 키보드로 소리를 미세하게 조정한 후 영화가 시작하는 장면에서 키보드의 왼쪽 화살표를 눌러 1초 뒤로 설정해놓는다. 몇 시간째 움직이지 않던 몸을 일으켜 큰일 치르듯 경건하게 화장실에 다녀온다. 유리 같은 몸이 깨지지 않게 살포시 침대에 눕는다. 팔을 휘휘 저어 침대에조금 떨어져 있던 블루투스 키보드를 언제라도 멈췄다가 재생시킬 수 있도록 팔 언저리에 둔다. 여전히 밖은 빗소리로 가득하다. 스페이스 바를 눌러 영화를 재생시킨다. 재생과 일시정지가 반복된다. '내가 알던' 영화가 아니다. 심지어 영화가 '영화가' 아니었다. 태평양 무인도 어딘가에 표류한 영화가 시아 대륙 동쪽 끝 원룸 안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1. PLAY

째깍째. 시간은 흘러간다. 째깍째깍. 택배회사 직원에게 시간은 금이다. 사실 시간 자체가 중요하진 않다. ‘빠른’ 게 중요하다. 째깍째깍. 매일 바쁜 삶을 살던 주인공은 애인과 크리스마스만 보내고 또 급한 출장을 떠나게 된다. 떠나기 10분 전, 주인공은 약혼자에게 시계를 선물 받는다. 해외출장이 잦았던 그는 시계를 받자마자 약혼자가 있는 나라의 시간으로 바꾼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내가 사랑하는 그녀의 시간 속에서 함께하겠다는 의지였다. “금방 돌아올게”라는 말과 함께 그는 출장을 떠난다. 12월 31일에 꼭 같이 있자는 약속을 맡겨두고.

금방 돌아올 수 있을 줄만 알았던 어느 때와 다름없는 출장길. 난기류에 비행기가 바다에 착륙하고 만다. 직원들도 보이지 않고 구명보트에 나 홀로 몸을 싣는다. 다음날 너덜너덜해진 구명보트 위에 얹어진 채 무인도에서 눈을 뜬다. “아무도 없어요?” “HELP”를 외치지만 오롯이 혼자 남겨졌다. 주머니 속 시계를 꺼낸다. 시계는 멈췄다. 빠르게 살던 그의 삶이 멈춰버린 것처럼. 바깥세상에서의 그의 삶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PAUSE

무인도에 표류한 <캐스트 어웨이> 주인공을 보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울기 직전 나는 입을 손으로 가린다. 바쁜 삶을 살던 내가 허리가 아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지금의 나와 그 주인공이 닮아서 눈에서 물이 터졌다.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나의 행동반경은 6평이었다. 내 방은 산도 아닌데 산골 같았고 바다도 아닌데 섬 같았다. 침대가 양탄자가 되길 바랐다. 평범한 삶 속에 나를 던져놓고 싶었다. 허리만 아플 뿐인데 5G 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역행했다. 눈물샘이 터지는 속도는 6G였을 테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2. PLAY

사태 파악이 우선이었다. 이곳저곳을 돌며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탐색에 나섰다. 여기가 어딘지 두리번거렸다. 사람은 없었다. 드넓은 바다와 나무, 코코넛이 전부다. 사람의 손길이 묻어있는 건 자신과 함께 불시착한 택배뿐이었다. 죽은 시계를 꺼낸다. 시계 안에 있는 약혼자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둠이 찾아온다. 예기치 않았던 삶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옷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고, 자신과 떠내려온 구명보트로 텐트를 만든다. 깨진 돌로 내려쳐 겨우 코코넛워터로 배를 채운다. 잠을 자다가 불빛을 보고 구조요청을 해보지만 보일 리 없다. 다음날 다시 구명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려 한다. 힘차게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파도는 그를 저만치 뒤로 보낸다. 그래도 나아간다. 더 커다란 파도가 다가와 물에 흠뻑 젖는다. 계속 노를 저어 본다. 파도는 그를 물속으로 처박아 버린다. 구명보트는 돌에 찢어지고, 산호에 그의 살도 찢어졌다. 바다에 피가 흐른다.


PAUSE

흔들흔들 멀미가 난다. 병원에서 허리를 탐색하는 동안 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돼서 어리둥절했다. 조짐도 없이 갑자기 왜 아프지. 순간이동 불시착인건가. 허리가 아픈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부정과 순응 사이에서 끄럼틀을 탔다. ‘젊은 20대인 내가, 허리 아파서 아무것도 못한다고? 나 젊은데? 그래도 금방 낫겠지. 좀 쉬었다가 조금씩 운동하면 괜찮아질 거야.’ 이런 마음으로 몇 달을 지냈지만 시간이 지나도 달라진 건 없었다. 다시 이전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발을 휘저걸어가 봤지만 허리는 내게  리어 메치기 기술을 걸었고 나는 곧 침대에 처박혔다. 누워있다가도 답답해 나갔다가 돌아와  아파하며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는 행위가 파도처럼 반복었을 때 비로소 자각한다. 내 허리는 돌이 아니라 한 줌의 모래구나. 하지만 뇌는, 내 마음은, 여전히 허리가 아프지 않은 과거 세상 속에서 허우적댔다.


#3. PLAY

그전 생활은 잊고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 같이 떠내려온 택배를 주워 뜯어본다. 비디오테이프, 계약서, 생일 축하카드와 윌슨사 배구공, 스케이트, 망사 나시 드레스가 전부다. 스케이트 날로 옷을 잘라 산호에 입은 상처를 덧대고 스케이트 끈으로 질끈 매듭지어 응급처치한다. 드레스에서 망사를 떼어내어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고, 스케이트 날로 나무를 깎아 게를 찍어 잡는다. 불을 만들 차례다. 하루 종일 나무를 문댔는데 불이 나오기는커녕 손에 피만 났다. 부아가 치밀어 옆에 있던 배구공을 잡아 던졌다. 피 묻은 손자국이 난 배구공에 눈, 코, 입을 만들고 나무 의자에 두었다. 다시 나무를 위아래로 문질러 불을 피워본다. 얼굴이 생긴 배구공에게 “혹시 성냥 같은 건 없지?”라고 말을 걸어본다. 해가 넘어가고 땀이 뚝뚝 떨어지도록 문질러 드디어 씨가 생겼다. 축제다. 섬에 있는 나무를 다 태워서라도 커다란 불을 만들어 사람들이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망설일 시간은 끝났어. 수렁에 빠진 시간도 끝이야. 너흰 자유야”라고 외친다.

PAUSE

사표를 냈다. 신없이 일하다가 저녁에 병원에 가 물리치료하거나 진통제를 맞고 그다음 날 일하는 쳇바퀴 생활을 한 지 네 달이 되어갈 쯤이었다. 리가 석고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면 허리가 바로 펴지지 않아서 접힌 부챗살을 펼치듯 하나하나 천천히 펴야 했다. 화장실에서 아파하다가 사무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하기 지쳐갔다. 꿈을 위한 여정을 포기해야 다. 화되허리를 치료하는 게 우선이었다. 집에서 요양하 병원에 다니면서 재활을 기반으로 한 필라테스를 해본다. 진통제, 한약, MSM, 관절약 등등 좋아지려고 온갖 약도 먹어본다. 쉬면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당황러웠다. 24살, 1차 허리디스크 습격에는 6개월 지나니까 점점 진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것저것 해보는데 1년 6개월이 지나도 전되지 않 오히려 허리 통증이 심해지고 팔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내 몸이 낯설게 느껴졌고 낌새가 수상했다.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통증이 계속되자 지인에게 추천을 받아 유명하다는 병원에 가 본다. MRI를 찍어보니 4-5번 디스크가 탈출하여 염증이 생겨 아픈 것이니 수술을 하면 나아질 거라고 한다. 왜 진작 이곳에 오지 않았던 거지. 당장 수술해야겠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지, 친구도 만나고 다시 일도 하고 꿈도 찾고 일상으로 입주해지. 이제 정말 고통은 끝이야. 나는 자유인이다! 희망이 불길처럼 번졌다.


#4. PLAY

을 만들어 구조요청을 했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곧 동굴로 이사한다. 동굴 벽에 현실적으로 자신을 찾으려면 얼마나 수색을 해야 하는지 끄적여본다. 계산해보니 50만 마일(804,672km). 텍사스 땅의 2배다. 자신을 못 찾을 것이라고 체념한다. 그것보다 앞에 닥친 문제가 있다. 치아가 속을 썩인다. 처음에는 씹을 때만 아프던 게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고통스럽다. 과거에 치과를 가지 않았던 게 후회가 된다. 피 묻은 손자국이 새겨진 배구공에불행 중 다행인 건 씹을 음식이 없는 것이라며 농담을 던진다. 배구공에게 자신의 의사가 돼 달라며 “닥터 윌슨”이라고 부른다. 내내 그의 옆에 자리하며 그의 말을 들어주는 배구공에게 '윌슨'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섬, 무인도에 있지만 그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겼다. 살아있지 않지만 교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바로 윌슨이다.


PAUSE


(...)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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